[단독] “김정철이 북·일 관계 막후 실세”…전격 수교 추진 가능성
(시사저널=이영종 뉴스핌 통일전문기자(북한학 박사))
지난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시카와현에서 발생한 지진과 관련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를 '각하'로 깍듯하게 호칭하면서 "당신과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에게 심심한 동정과 위문을 표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노동신문 등 관영 선전매체가 전했다.
김정은이 일본 총리에게 이런 전문을 보낸 건 전례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더욱이 윤석열 대통령을 향해 연일 극렬한 비난과 대남관계를 '적대(敵對)'로 가져가겠다는 호전적 발언을 쏟아내는 상황이라 강한 대비를 이뤘다.
"보위부 조직 동원해 일본 라인 움직여"
북·일 관계는 늘 예상치 못한 국면에서 전격적으로 진전되거나 비밀접촉을 통해 채널이 가동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두 차례 열린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정상회담이 이를 보여준다. 이 때문에 작은 징후 하나에도 한국 등 주변국 정부와 언론매체들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가 최근 북·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직접 "구체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밝혀 북·일 관계 정상화에 대한 기대감이 꿈틀거리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2월9일 중의원(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일 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한 질문에 "제가 스스로 필요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과의 접촉 여부를 확인하는 언급은 없었지만 모종의 구체적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의 반응은 이례적으로 기민한 형국이다. 기시다의 발언 엿새만인 15일 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담화를 통해 "이번 발언이 과거의 속박에서 대담하게 벗어나 조일관계를 전진시키려는 진의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면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김여정은 "(기시다) 수상이 평양을 방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분위기를 띄우기도 했다. 앞서 지난해 5월 박상길 북한 외무성 부상은 기시다의 북·일 정상회담 용의 표명에 대해 "만일 일본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된 국제적 흐름과 시대에 걸맞게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대국적 자세에서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관계 개선의 출로를 모색하려 한다면 조일(북·일) 두 나라가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공화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밝혔다. 이런저런 조건이 달린 듯하지만 '만날 수 있다'는 쪽에 방점이 찍힌 것이란 해석이다.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북한의 의지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정황도 드러난다. 서울의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의 친형인 김정철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접촉과 북·일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막후에서 총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르몬계 이상 질환으로 최고권력자 자리를 동생에게 내준 김정철이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직함으로 북한의 일본 관련 업무를 총괄하고 있기 때문에 김정은-기시다 정상회담 건도 책임지고 있다는 얘기다. 북한 고위층 출신인 이 소식통은 "김정철이 보위부 조직을 동원해 노동당과 외무성의 일본 라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은과 김정철 형제의 생모인 고용희는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한 북송 재일교포 출신이다. 그는 제주 출신인 부친을 따라 온 가족과 함께 만경봉호를 타고 입북했고, 고용희는 만수대예술단 무용수 시절 김정일과 만나 정철·정은·여정 등 2남 1녀를 뒀다.
韓·쿠바 국교 수립 만회 카드로 속도 낼 수도
이런 배경 때문인지 이들 남매의 일본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지 않고 어떤 측면에서는 우호적이거나 선망하는 듯한 모습이 감지된다. 김정은이 일제 렉서스 스포츠유틸리티(SUV) 차량을 즐겨 타거나 일본 닛산 쌍안경으로 미사일 발사를 참관하는 장면도 포착된다. 딸 주애가 자리한 식탁에 일제 깨소금이 올라있는 모습도 김정은이나 그 일가가 일본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면 보기 쉽지 않을 수 있다.
사실 북·일 관계는 양측이 결심만 굳힌다면 언제든 급진전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미 2차례 정상회담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잘 파악하고 있는 데다 국장급 물밑 접촉을 가동하면서 교감해 왔다는 점에서다.
북·일 스톡홀름 합의는 양측이 관계 정상화와 수교를 향해 가는 로드맵일 수 있다. 2014년 5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송일호 북한 외무성 조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와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은 북·일 관계 개선 문제를 위한 논의 사항을 정리해 합의문으로 발표했다. 앞서 같은 해 3월31일부터 4월1일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국장급 사전 협의를 은밀하게 진행한 결과였다.
물론 북한과 일본이 관계 정상화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녹록지는 않다. 가장 대표적인 건 요코타 메구미(1977년 실종 당시 13세 중학생)를 비롯한 납치 일본인 이슈다. 일본 국민 여론이 가장 민감하게 여기고 정부와 정치권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사안으로 여겨진다.
양측 입장은 팽팽하다. 일본 측은 모두 17명으로 파악되는 납북자 중 2002년 9월 고이즈미 당시 총리가 일시 귀환 형태로 데리고 온 5명을 제외한 12명은 여전히 북한에 남아있다고 보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은 남은 납치 일본인은 8명뿐이며 모두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4명의 납북자에 대해 "납치한 일이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이 내부적으로 이른바 항일 빨치산 세대와 군부 엘리트,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도 풀어야 할 숙제다. 고용희의 아버지 고경택은 제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오사카로 건너가 일본군 군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소위 '백두혈통' 운운하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우상화에 몰두해온 북한 체제의 핵심축이 사실은 '후지산 줄기' 또는 '한라산 줄기'라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김일성 항일투쟁'을 과장·왜곡해온 북한 최고지도자의 외가가 실은 독립군이나 항일 세력을 토벌하는 일본군의 군수품 생산에 종사했다는 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북한 체제의 특성상 이런 배경을 드러내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김정은이 결심해 이행할 경우 별다른 정책 부담이나 저항이 없을 것이란 견해에도 힘이 실린다.
북·일 관계 정상화 추진의 또 다른 변수는 2월14일 이뤄진 한국과 쿠바의 국교 수립이다. 북한은 '형제국'으로 여겨온 쿠바로부터 외교적 배신을 당하는 쓴맛을 봤고 이는 1992년 한중 수교 때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김정은으로서는 이런 국면을 탈피하고 만회하는 차원에서 일본과의 수교 쪽으로 움직이는 카드를 서둘러 내놓을 공산도 있다.
무엇보다 핵과 미사일 도발로 자초한 대북제재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이 일본으로부터의 청구권 자금 유입이나 경협 지원 등을 겨냥해 북·일 관계 진전에 속도를 낼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은의 형 김정철의 존재감이 어디까지 드러날지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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