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승리한 ‘인니 트럼프’…잘 나가던 인도네시아 경제가 불안하다[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2024. 2. 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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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가 14일 치러진 인도네시아 대선에서 사실상 승리했다. 공식 개표 결과는 한 달 뒤에나 나오지만, 여론조사 결과 프라보워의 과반 득표가 확실시된다. AP 뉴시스

유권자만 2억명 넘는 인도네시아 대통령 선거가 14일 치러졌죠. 여론조사 결과, 예상대로 현 국방장관인 프라보워 수비안토 후보의 당선이 유력합니다. ‘독재자의 오른팔 출신’의 승리에 민주주의 후퇴가 우려된다는 반응이 나오는데요.

우리가 인도네시아 대선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사실 경제 때문이죠. 자원부국 인도네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상당한데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비슷한 성향의 새 리더를 맞이하게 된 인도네시아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16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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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판 트럼프’의 당선

지난해 6월 딥다이브에서는 2024년 인도네시아 대선에 대해 이렇게 예측(?)했습니다. ‘누구든 조코위 현 대통령이 미는 사람이 당선될 확률이 커 보인다’고요. 그리고 역시 그렇게 됐습니다.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인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37)를 러닝메이트로 삼은 프로보워 후보가 3수 끝에 대선 승리를 선언했죠. 사실 공식 선거 개표 결과는 한 달 뒤에나 나오지만, 표본 출구조사 결과(득표율 58%)가 꽤 정확해서 뒤집힐 일은 없어 보입니다. 과반수 득표에 성공하면 6월에 결선투표를 치를 필요 없이 바로 당선이 확정됩니다.

프라보워(72세)와 조코위(62세). 정반대 캐릭터이죠. 프라보워가 명문가 출신의 거만한 전직 장군이라면, 조코위는 서민 출신의 부드러운 전 가구 제조업자입니다. 프라보워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닮았다면, 조코위 별명은 ‘인도네시아 오바마’이죠. 특히 프라보워는 인도네시아를 30년 넘게 통치한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사위(수하르토가 하야한 1998년 이혼)이자 친위대장 출신으로, 민주화 운동가 탄압에 관여한 전력이 있습니다. 소통에 강한 문민 정부 지도자인 조코위와는 도통 닮은 점을 찾을 수 없죠.

그런데 그 둘이 손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는 정치판이라지만, 참 놀라운 일인데요. 도대체 왜? 조코위 대통령이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하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거겠죠. 친족주의와 정실주의. 인도네시아 정치의 오랜 폐습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프라보워 후보는 조코위 대통령의 장남인 기브란을 러닝메이트로 영입해 조코위의 인기를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 기브란은 40세가 되지 않아 선거법상 부통령 출마가 불가능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이와 관련한 헌법소원을 인용 결정하면서 출마할 수 있었다. 당시 헌법재판소장은 그의 고모부였다. AP 뉴시스

인구 2억7600만명인 인도네시아는 세계 세 번째로 큰 민주주의 국가(1위 인도, 2위 미국)이죠. 하지만 아직도 정치와 경제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수하르토 시절부터 부를 축적한 지배층입니다. 재벌이 정치까지 주무르는 ‘그들만의 세상’이죠.

조코위가 2014년 당선됐을 때만 해도 이 낡은 구조를 일소할 거란 기대를 받았는데요. 조코위 대통령은 그 대신 실용주의를 택했습니다. 영리하게 기득권층을 달래고 어르고 타협하면서 자신의 개혁안(규제 개혁, 신수도 건설 등)을 통과시켰죠. 덕분에 경상수지 균형, 5%대 경제성장률, 수천 ㎞의 도로를 포함한 인프라 건설 같은 눈에 띄는 성과도 올렸고요. 지난해 말 여론조사에서 조코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70%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국제투명성기구의 2023년 부패인식지수에서 인도네시아는 180국 중 115위를 기록했습니다. 2019년 이후 점수가 오히려 떨어졌죠. 이런 상황에서 기득권층의 대표 주자 프라보워가 권좌에 오르게 된 겁니다. 인도네시아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누리 옥타리자 연구원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에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기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교육, 의료인프라, 빈곤, 일자리 창출, 부패 근절 문제가 여전히 주요 초점이죠. 프라보워의 군사주의적 배경과 포퓰리즘적 성향을 고려할 때 그가 어떤 지도자가 될지는 매우 불확실합니다.”

니켈 부국이 불안한 이유

2차전지에 들어가는 니켈제품 이미지. 하리타니켈 홈페이지
전 세계가 인도네시아에 주목하는 건 그 경제적 잠재력 때문이죠. 인구대국이자 자원대국인 인도네시아는 최근 2년 연속 5%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강한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아직은 GDP 기준 세계 16위이지만 이런 성장세라면 10여 년 뒤엔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설 전망이죠. 물론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보다 더 야심 찬 계획(2030년 세계 10위, 2045년 세계 5위)을 밝혔지만요.

이런 성장 배경엔 니켈 중심의 산업정책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니켈은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이죠. 인도네시아는 니켈 매장량 세계 1위 국가이고요. 지난해 글로벌 니켈 시장에서 이 나라는 무려 점유율 55%를 차지했는데요.

2020년 인도네시아는 니켈 원광(가공 전 단계) 수출을 전격 금지해버렸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니켈을 가공하도록 강제했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에 니켈 제련공장과 배터리 제조 공장을 만들기 위한 외국기업 투자가 밀려드는 효과를 거뒀죠. 자동차 산업이랄 게 없던 이 나라에 BYD, 포드, 그리고 현대자동차까지 앞다퉈 진출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자원 무기화의 승리’라 할 수 있는데요. 문제는 글로벌 니켈 시장이 지난해부터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겁니다. 공급 과잉 때문에 니켈 가격이 뚝뚝 떨어지는 건데요. 2022년 3월 t당 4만8000달러를 찍었던 니켈 가격은 이제 1만6000달러로 3분의 1토막 났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해도 40% 가까이 떨어졌죠.

니켈 선물 가격 추이. 2022년 3월 t당 4만8000달러를 돌파했지만 지금은 1만6000달러 선에 머물러 있다. 트레이딩 이코노믹스

니켈 공급 과잉의 주범은 누구일까요. 세계은행도, 맥쿼리도 모두 인도네시아를 지목합니다. 맥쿼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인도네시아의 니켈 생산량이 지난해 30% 급증하면서 다른 국가에선 수익성 없는 니켈 광산을 폐쇄하고 있다고 전했는데요. BHP그룹, 파노라믹 리소시스, 와일루 메탈스 같은 굴지의 호주 광산기업이 니켈 채굴을 중단했습니다. 이 가격으론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 맞는 거죠.

경쟁자들이 나가떨어졌으니, 이제 인도네시아가 시장을 장악할 기회일까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니켈 공급 홍수로 인해 인도네시아 니켈산업조차 휩쓸려버릴 위험에 처했는데요.

인도네시아 광산전문가협회의 리잘 카슬리 회장이 최근 CNBC와 인터뷰한 내용이 무시무시합니다. 그는 현재 건설 중인 니켈 제련소가 모두 완공되면 “거의 1200만t 정도 공급이 늘어나게 된다”고 전하죠. “세계 시장에 니켈이 넘쳐날 것”이라며 걱정하는데요. 지난해 인도네시아 전체 니켈 생산량은 약 200만t. 그 6배 물량이 앞으로 더 쏟아져나온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이미 공급 과잉인데, 그 많은 물량을 어떻게 소화할까요. 공급 폭탄이 현실화하면 니켈 가격 붕괴는 피할 수 없습니다.

‘조코위 2.0’ 기대하지만

14일 투표하는 조코위 현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모습. 2014년부터 10년 동안 집권해온 조코위는 3선을 금지한 법에 따라 더이상 출마할 수 없다. AP 뉴시스

요약하자면 인도네시아 경제 성장을 이끈 조코위 대통령의 ‘니켈 무기화’ 약발이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팜유나 석탄 같은 다른 주요 수출품 가격도 하락세에 있고요.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의 성장 둔화까지 겹치면서 당분간 수출 전망은 썩 밝지 않습니다. 게다가 심각한 빈부 격차와 고질적인 부정부패 문제는 여전히 골칫거리인데요. 즉, 인도네시아 경제가 한단계 도약하려면 앞으로 10년이 정말 중요한 시기입니다.

10월 대통령에 취임할 프라보워는 인도네시아 경제를 어떻게 이끌까요? 일단 그는 선거 기간 내내 ‘조코위 정책 계승’을 내걸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정책입니다. 니켈을 포함한 천연자원을 활용한 공급망 생태계를 구축을 더 확대하고(이른바 ‘다운스트림’ 정책),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규제를 개혁하고, 새로운 수도 누산트라 건설을 계획대로 진행해나가겠다는 거죠. 바로 그 점-크게 달라지지 않고 안정적일 거란 기대- 때문에 그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프라보워의 승리 소식이 알려진 15일 인도네시아 증시는 1%대 상승으로 마감했는데요.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인도네시아 경제에 긍정적인 것도 프라보워 정부가 ‘조코위 2.0’이 될 거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JP모건은 현재 7300포인트 수준인 자카르타종합지수가 올해 7500까지 오를 걸로 내다봤고요. 씨티그룹은 7750포인트를 제시합니다. 투자회사 야누스헨더슨의 펀드매니저 샛 두흐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코위 정부는) 오랜 경상수지 적자와 외국인 직접 투자 문제를 해결했고 인프라 측면에서 많은 진전을 이뤘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와도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인도네시아 전문가인 싱가포르 난양기술대학 알렉산더 아리피아노 연구원 분석은 좀 다릅니다. 그는 상당히 불확실성이 크다고 얘기하죠. “프라보워는 지금 조코위에 경의를 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도네시아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 자원을 투입할 겁니다.”

15일 경찰관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올라탄 프라보워. AP 뉴시스

걱정스러운 ‘판차실라 경제관’

괜한 의심이 아닙니다. 프라보워는 이미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경제관을 밝힌 적 있는데요. 현지 언론에 따르면 그는 인도네시아가 ‘판차실라 경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판차실라 경제? 도대체 그게 뭘까요. 일단 판차실라(Pancasila)는 1945년 제정된 인도네시아 헌법 전문에 실린 건국 이념인데요. 다섯개 원칙(신에 대한 믿음, 인도주의, 통합, 민주주의, 사회 정의)으로 구성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통합을 추구하는 정신이라 하겠는데요. 참 이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싶은 이념이긴 합니다.

문제는 판차실라가 과거 정권에서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곤 했다는 거죠. 수하르토 시절 악명 높았던 극우 정치깡패 집단 이름이 ‘판차실라 청년단’이었으니까요.

어찌 됐든 판차실라 자체는 우리나라 ‘홍익인간’처럼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념인데요. 프라보워는 자신의 국수주의적 경제관을 판차실라로 교묘하게 포장합니다. 그는 판차실라 경제론을 이렇게 설명했죠. “이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 즉 중도의 길입니다. 인도네시아는 항상 중간 길을 택했습니다. 제로섬 게임이 아닌 타협입니다.” 그러면서 생산 부문은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 개인이 아닌 국가 이익을 중시해야 한다, 평등주의적이고 대중적인 경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칩니다.

아울러 “현재 인도네시아 경제는 신자유주의로 향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규제완화와 금융시장 개방, 국영기업 민영화와 재정건전성 강화 같은 조코위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을 죄다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낙인찍은 겁니다. 갑자기 웬 신자유주의 타령인가 싶을 텐데요. 그는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국가의 부를 해외로 빠져나가게 만드는 매판 자본주의’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로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들이게 만든 경제정책들이 죄다 국가의 번영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보는 거죠.

어떤가요. 이해되시나요? 인도네시아 경제는 이제 간신히 재정 건전성 높이고 외국 투자자 신뢰를 되찾고 있거든요. 더 많은 외국인 투자를 끌어오기 위해 발벗고 나서도 모자랄 판인데요.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운운하는 건 너무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은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평판이 좋은 경제관료이다. 조코위 정부에서 그는 만성 적자에 시달렸던 인도네시아의 재정건전성을 높이고,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 데 주력했다.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펼치는 그는 인도네시아 보수 기득권층과 예전부터 자주 충돌해왔다. AP 뉴시스

오죽하면 해외에서도 유능한 경제관료로 명성이 높은 스리 물야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이 지난달 사임하려고 했다는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됐죠. 그는 그동안 국방장관인 프라보워와 예산 때문에 번번이 충돌해왔는데요. 조코위 대통령이 대선에서 프라보워 편에 서는 걸 보고 열 받아서 장관을 관두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가 실제 물러나진 않았지만(후임자의 예산 낭비가 걱정돼서 사임하지 않았다고), 이 소문만으로 인도네시아 통화가치가 한때 출렁거렸을 정도로 금융시장엔 충격을 줬습니다.

아직은 공식적으로는 프라보워가 후보자 신분이니 ‘조코위 정책 계승’ 약속을 바로 뒤집지야 않을 텐데요. 막상 권좌에 오르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 기업도 인도네시아 시장을 유망하게 보고 많이 진출해왔죠. 인도네시아판 트럼프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By.딥다이브

프라보워 후보는 한국과 악연이 있습니다. 2019년 국방장관이 되자마자 한국과 공동개발한 KF-21 전투기 사업 분담금 지급을 중단해버렸기 때문이죠. 그는 지난해 카타르에서 중고 미라지 전투기 12대를 구매키로 해서 또다시 한국 뒤통수를 쳤는데요. 이 계획은 스리 물야니 재무장관이 예산을 주지 않고 버티면서 결국 무산되긴 했습니다. 국가간 약속도 쉽게 깨버리는 프라보워에게 과연 신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인도네시아 대선이 프라보워 후보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조코위 현 대통령의 장남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친족정치, 정실정치 악습이 되살아났습니다.

-자원 부국 인도네시아 경제는 양호한 성장을 기록 중이지만, 걱정거리도 있습니다. 성장의 큰 축인 니켈산업이 공급과잉 여파로 가격 폭락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앞으로 10년이 인도네시아 경제엔 중요한데요. 일단 프라보워는 대선 공약에선 ‘조코위 경제 정책 계승’을 주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국수주의적 경제관을 볼 때, 그가 약속을 지킬지 의문입니다. 그는 규제개혁이나 재정건전성 강화 같은 기존 경제 정책을 ‘외국 기업만 배불리는 신자유주의’로 매도합니다. 솔직히 좀 우려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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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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