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하고 선명한… 기억 속 풍경, 감각의 잔상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4. 2. 17.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때 그곳 공기·냄새·분위기
오직 기억·상상 기반해 구현
경험 스며든 독자적 풍경화
안개처럼 희미한 이미지 속
형체 선명하게 드러내는 선
아크릴릭 과슈 맑은 붓터치
시간의 층위처럼 겹겹이 중첩
학고재서 3 초까지 개인전
“장면 속 특유의 대기 형상화
프레임 밖으로 공간영역 확장”
수년 전, 붓에 실린 유채 물감의 뭉근한 질감을 화면 위에 길게 던지듯 또 한편 가까이 끌어오듯 그린 특유의 촉각적인 화면을 두고 장재민(40)은 풍경으로부터 얻은 감각을 직관적으로 재현한 시도라 했다. 장소의 객관적 생김새를 묘사하기보다 그것이 개인의 주관적 기억에 남긴 잔상에 주목하는 그리기다. 그때 그곳의 공기에 스민 습도와 냄새, 분위기와 정서를 복기하며, 시각 너머 공감각을 회화의 방식으로 변환하는 일이다. 회화의 언어로 재정렬된 감각의 잔상들은 그로써 독립된 장소가 되어 또 다른 눈들에 목격된다. 형상들은 묵직한 유채의 질량이 밀려온 자리마다 숨죽여 뭉근해진다. 물감이 싣고 온 우발적 감촉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깊은 웅덩이 끝’(2023). 학고재 제공
장재민이 학고재에서 ‘라인 앤 스모크’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연다. 학고재 본관에서 1월31일 개막해 3월2일까지 진행되는 전시로 지난해 제작한 22점의 회화 작품을 선보인다. 2022년 통의동 보안1942에서 연 개인전 이후 2년 만이다. 2014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에서 첫 개인전을 선보인 지 꼭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작품활동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인 터 회화의 재료에 변화를 준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꾸준히 유채 물감의 물성을 고수해 오던 그가 수성 재료인 아크릴릭 과슈로 그린 신작들만으로 출품작을 구성했다.
장재민은 홍익대학교 회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취득했다. 첫 개인전을 연 2014년 제36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에 이름을 올렸고 이듬해인 2015년 제4회 종근당예술지상 수상 및 금호영아티스트에 선정되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2014), 포스코미술관(2015), 금호미술관(2016), 오픈스페이스배(2016), 에이라운지(2018), 피앤씨갤러리 풍국창고(2018), 학고재(2020), 보안1942(2022)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대전시립미술관, 스페이스K, 포스코미술관, 하이트컬렉션, 미메시스아트뮤지엄,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등 국내 주요 미술관과 도멘 드 케르게넥 미술관 등 해외 기관이 연 단체전에 참여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정부미술은행 및 미술은행, 부산현대미술관, 국립해양박물관, 금호미술관, 미메시스아트뮤지엄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열매들’(2023)
◆모호한 안개 사이 떠오르는 획 - 기억의 풍경

장재민의 말에 따르면 전시의 명제가 환기하는 ‘선’과 ‘연기’는 각각 “형체를 붙들려 하는 선과 그 안을 채우던 것들이 연기처럼 허무하게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상태”를 가리키는 상징이다. 형상을 이루는 요소에 관한 고민인 한편 대상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전시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는 이미지에 반하여 더 선명해지는 어떤 윤곽들, 시각적 껍질과 대비되는 비가시적 알맹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포괄적으로 은유한다.

회화 재료의 전환에 앞서 주제 및 소재를 바라보는 방식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전시에 선보인 근작은 실제 현장을 답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오롯이 기억과 상상에 기반해 그린 장면들이다. 서문을 쓴 문소영 큐레이터는 “그림 속 이미지들은 실재하지 않는 곳이며, 경험으로부터 자라났지만 상상을 통해 열매처럼 맺히고 개별적인 그림으로 수확된 독자적인 풍경”이라고 설명한다. “작가의 필적을 통해 마음에 스며있던 시간들이 캔버스 위로 우러난다”는 것이다. “기존 작업에서 유화의 점도 있는 물성을 통해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을 손으로 빚어내듯 비유의 형태로 구현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건조한 듯 얇은 레이어들이 뭉근한 깊이감을 자아내고, 관찰자의 시선을 구름처럼 드러난 풍경 속으로 스며들게 한 그림을 보여준다.”

과거 유화가 풍경을 마주한 순간의 직관적 감각을 붙잡고자 했다면 과슈로 그린 근작 화면은 기억 속에서 지연된 이미지의 정체를 더듬어 나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이전 작업이 장소의 공감각적 첫인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순간의 촉각적 물성을 드러내기 탁월한 유채를 선택했다면 근작은 모호한 기억과 어렴풋한 정서로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장소를 더듬어 묘사하기 위하여 아크릴릭 과슈를 매체 삼는 것이다. 다시금 문소영의 문장을 빌리자면 “시간을 통해 원래의 경험에서 분리된 기억들은 작업 속에서 추상처럼 드러나기도 하고, 구름처럼 보는 이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나무였다가 새가 되기도 하고, 호수인 줄만 알았는데 다가가니 하늘이 되는―형체로 그려지기도 한다.”
‘검은 막’(2023)
전시장 중앙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깊은 웅덩이 끝’(2023)은 제주도 서귀포의 자연하천 ‘쇠소깍’ 풍경을 소재 삼아 제작된 회화다. 쇠소깍은 효돈천의 담수와 해수가 맞닿아 형성된 깊은 웅덩이로, 주위를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소다. 같은 소재를 그린 2020년의 동명의 유화 작품과 대조하면 표현의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구작이 힘찬 붓으로 장소의 어둑하고 습윤한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집중한 반면, 근작 화면은 붓의 완급을 조절하며 중앙의 고요한 수면과 주위의 거친 돌벽을 극명하게 구분함으로써 물 위에 뜬 배의 형상에 한층 명상적인 정서를 투영한다.
수성 매체인 아크릴릭 과슈는 유채 물감에 비해 가볍게 발리고 빠르게 건조된다. 그렇기에 화면을 지나는 붓의 궤적이 보다 투명하게 중첩된다. 작가의 손이 행하는 매 순간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발자국으로서 화면 위에 박제된다. 바람처럼 쌓이거나 엉키듯 뒤섞이는 붓질로, 안개처럼 흐린 기억 속에서 정체 모를 몇 가닥 획을 불현듯 수면 위로 밀어 올리며. 무채색에 가깝도록 낮은 채도의 색을 주조로 한 화면 가운데 ‘열매’(2023)에 맺힌 과실이나 ‘검은 막’(2023)의 옥수수 나무 이파리들이 선명한 빛깔로서 드러난다. 기억 속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의 빛나는 색채가 갈수록 또렷해졌을 터이고, 검은 천막에 가리운 옥수수 밭의 초록 잎사귀들이 실제보다 더 찬란한 이미지로서 각인되었을 것이다. 맑은 색채 표현에 탁월한 과슈의 특성 또한 색채의 떠오름에 일조했을 터다.
장재민 개인전 ‘라인 앤 스모크’(2024, 학고재) 전시 전경.
◆부유하는 캔버스들

기억의 출처로부터 그림을 그리는 당시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위처럼, 깃털처럼 가뿐한 붓의 흔적들이 화면에 중첩된다. 그러한 시각의 층계를 전시장 내 공간 연출에도 응용하고자 했다. ‘깊은 웅덩이 끝’은 관객의 시선 방향에 변화를 주고자 기울어진 각도로서 설치되었다. 한편 전시장 안쪽 방에 걸린 ‘새들의 자리’(2023)와 ‘먼 곳의 밤’(2023)은 서로의 뒷면을 맞댄 채 허공에 떠오른 모습이다. ‘불꽃’(2023)과 ‘Boards’(2023)도 마찬가지다. 시각적 중첩을 은유하는 장치인 동시에 부유하는 캔버스들로 하여금 공간을 낯선 방식으로 구획하도록 한 의도다.

장재민이 고백하기를 “어떠한 장면이 저마다의 대기를 형성하여, 프레임 밖으로 그 공간적 영역을 확장하는 상태를 떠올렸다”고 한다. 장소에 대한 주관적 기억을 객관적 세계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공명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일 것이다. 다분히 입체적인 세상으로부터 건져 올린 감각을 평면 위 그림으로 거듭 번역해 내는 작업의 주된 과제이지 않을까. 회화의 물성 안에 붙잡아 둔 감각들이 현재의 공기를 어렴풋이 물들인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