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김수임,모윤숙,노천명...체홉 연극에 나선 용감한 신여성들

1934년 12월7일 오후 6시반 조선호텔 건너편 경성공회당에서 러시아 극작가 체홉(1860~1904)의 연극 ‘벚꽃동산’(櫻花園)이 올라갔다. 일본 유학생들이 만든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이하 劇硏·극연)가 체홉 30주기 겸 창립 3주년을 기념해 올린 공연이었다. 극장은 가득찼다.
‘정각 전부터 오랜만에 연극다운 연극을 보기 위하야 몰려든 관중은 넓은 장내를 비좁다할만치 채웠다. 개막이 되매 상연된 각본은 벌써부터 소개가 넓게 된 안톤 체홉 원작 ‘앵화원’으로 오랫동안 닦은 무르녹은 연기는 만장한 관중으로 하여금 나를 잊어버리도록 하였다.’(‘세련된 舞臺面에 만장관중은 陶然’, 조선일보 1934년12월8일)

◇연애 스캔들 계기가 된 ‘벚꽃동산’
극예술연구회는 1931년 7월 서항석 유치진 김진섭 이하윤 이헌구 함대훈 장기제 정선섭 조희순 최정우 등 ‘해외문학파’ 계열 신예 10명과 연극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윤백남, 홍해성 등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결성한 신극단체였다. 동경외국어학교에서 노문학을 전공한 함대훈이 번역을 맡은 ‘벚꽃동산’은 홍해성이 연출했다. 단 이틀, 2회 공연이 전부였다.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한 덕분에 신문에 사고(社告)가 몇 차례 실렸고, 30주기를 맞은 체홉의 인생과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기사가 집중적으로 나갔다.
당시 여배우들이 부족했는데, 신예 시인으로 주목받던 모윤숙, 노천명 같은 엘리트 여성이 배우로 출연해 주목을 끌었다. 모윤숙이 주인공 라네프스카야를 맡고, 조선중앙일보 기자였던 노천명이 라네프스카야의 딸 아냐로 나섰다. 연극평론가 안영일은 두 사람의 연기에 대해 합격점을 줬다.
보성전문교수 김광진과 노천명의 연애 스캔들도 체홉의 ‘벚꽃동산’이 계기가 됐다. 김광진이 ‘배우 노천명’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린 것이다. 서른 한살 김광진은 유부남이었고, 스물셋 노천명은 미혼이었다. 둘은 결혼 약속까지 오갔지만, 김광진이 본처와 이혼하려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이혼을 결행하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벚꽃동산’은 1930년11월 이화여전 학생들이 홍해성 연출로 올리기도 할 만큼, 조선에서 일찍부터 주목한 체홉의 대표작이었다.

◇'나는 체홉에게 리얼리즘 배웠다’(이효석)
1920년대 조선에서 러시아 문학의 영향력은 유별났다. 영문학을 능가할 정도였다.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1907~1942)은 경성고보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썼다. ‘14,5년전 조선 신문학의 초창기였던 만큼 일반으로 문학열이 지극히 높았던 모양이다…소설로는 하이디와 졸라 등 영불의 문학도 읽히지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노문학의 열을 따를 수는 없었다.푸쉬킨, 고리키를 비롯하여 톨스토이, 툴게네프 등이 가장 많이 읽히워서 ‘부활’이나 ‘그 전날 밤’의 이야기쯤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져서 (기숙)사내에서는 거의 통속적으로 전파되게 되었다.’( ‘나의 수업시대’158, 이효석전집 7)
이효석은 열여섯, 열일곱살때 ‘체홉의 작품을 거의 통톡했다’면서 ‘그에게서 리얼리즘을 배웠다’고 고백할 만큼 체홉 마니아였다. ‘아무리 ‘지리한 이야기’라도 소설로서는 무척 재미있는 것이 그의 문학이다. 리얼리즘이라고 하여도 훌륭한 예술일수록 그 근저에는 반드시 풍순한 낭만적 정신과 시풍이 흐르고 있는 것이니 체홉의 작품이 그 당시의 것으로는 그 전형인가 한다.’(‘나의 수업시대’ 158~159)

◇'체홉은 슬픈 편지를 가져오는 배달부’(이태준)
‘문장강화’로 이름난 소설가 이태준(1904~?)은 자신을 감화시킨 작가로 체홉을 꼽았다. 이태준은 ‘묘사에 거짓이 없고 한 자(字) 한 구(句)가 객설이 없이 간결담려(淡麗)하다’면서 ‘이런 훌륭한 이의 글을 원서로 읽어보지 못하는 것은 한사(恨事)중에 하나이거니와 역서를 통하여서나마 체홉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만도 나는 나의 행복중의 하나로 헤아릴 것이다’라고 했다. ‘체홉은 채플린, 슈베르트와 같은 맥의 예술가라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에게 슬픈 편지를 가져오는 배달부들이다. 이들의 작품을 대하고 날때마다 나는 가엾은 친구의 소식을 들은 것처럼 가슴아프다.멍-하니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이다.’(이태준, ‘안톤 체홉의 애수와 향기’, 동아일보 1932년2월18일)
◇함대훈, 조선일보에 체홉 작품 연재
외국문학 번역의 역사를 정리한 김병철의 선구적 업적(‘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1975)에 따르면, 1920년대 번역된 러시아 문학은 영문학에 버금갔다. 당시 신문,잡지에 소개된 서구문학 작품(671편) 중 러시아문학은 127편으로 영문학(151편)에 이어 두번째였다. 특히 소설에 관한 한, 러시아문학이 영, 미, 불, 독의 어느 나라보다 많이 소개됐다. 러시아 작가 중에선 체홉 소설이 11편으로 최다를 차지했고, 톨스토이(10편)가 뒤를 이었다. 1924년 권보상이 번역 출간한 ‘체홉단편집’에도 11편이 실려있기 때문에 체홉 소설만 22편 이상이 번역된 셈이다. 1930년대에도 체홉의 단편 소설은 계속 소개됐는데, 특히 ‘곰’ ‘구혼’ ‘기념제’같은 희곡이 번역 소개됐다. 역자는 모두 함대훈이고, 조선일보에 연재된 게 특징이다.

◇토월회 창단에 등장한 체홉의 ‘곰’
초창기 신극단체인 토월회가 1923년 첫 공연에서 체홉의 ‘곰’을 올릴 만큼, 체홉은 한국 연극사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22년 박승희,김기진·김복진 형제, 김을한, 박승목, 이서구, 이제창, 연학년, 이수창 등 동경유학생 9명이 결성한 토월회는 1923년 단막극 4편을 올리면서 창단을 알렸다.
‘동경 유학생중에 연극과 문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의 조직인 토월회에서는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생들이 동경 각 극장에서도 제일 유행하던 극을 선택하야 오는 6월27일부터 5일간을 두고 단성사에서 거행하리라는데 각본을 듣건대 미국 ‘유-전 필로트’의 작 ‘기갈’과 노국 ‘안톤 체홉’의 작 ‘곰’과 영국 ‘뻐-나드 소’의 작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느냐?’와 박승희씨의 작 길식(吉植)이라 하며 그 후에는 다시 7월25일에 개최할 터인데 역시 이삼종의 재미있는 것이오 7월5일경에는 동아부인상회를 빌려가지고 미술전람회를 개최하리라더라.’(‘토월회의 공개극’, 조선일보 1923년6월13일)
‘곰’주인공은 연학년이 맡았다. 준비가 미흡했던지 실제 공연은 7월4일~8일 조선극장에서 열렸다. 첫 날 버나드 쇼 작품을 공연하다가 대사를 잊어버리는 통에 도중에 막을 내리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유학생 중심의 아마추어 공연인데다 대중적이지 않은 작품 때문에 2400원이라는 빚만 지는 참패였다고 한다. 하지만 ‘무대장치와 등장인물의 조화가 매우 교묘하여 식자의 칭찬이 많았다’(동아일보 1923년7월8일)는 호평도 있는 것으로 보아 화제가 된 모양이다. 함대훈은 ‘곰’을 신문(조선일보 1931년 8월8일)에 번역, 소개하기도 했다.

◇김수임, 체홉 단막극 ‘기념제’ 출연
본격적 신극단체로 꼽히는 ‘극예술연구회’는 1933년 제3회 공연에서 유치진 처녀작 ‘토막’, 카이젤의 ‘우정’과 함께 체홉의 ‘기념제’를 올렸다. 이 공연 역시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했다.
‘극예술연구회에서는 오는 2월 9일, 10일 양일을 기하야 본사 학예부 후원하에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제3회 공연을 한다함은 누보한 바어니와 동회에서는 방금 맹연습중인데 벌써부터 인기는 집중되어 있다 한다. 더구나 금번은 동 회원의 총출연으로 더욱 일반은 이에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다는데 출연할 동회원은 극문학에 다년 연구가 깊은 조선문단의 활약하는 인사들과 교육계 언론계 실업계에 종사하는 인사들도 출연하게 되어 일반의 흥미와 기대는 더욱 높다.’(‘문단인도 등장’, 조선일보 1933년 1월31일)
‘기념제’는 함대훈이 주인공 쉬푸친, 광복 후 ‘여간첩’으로 처형된 김수임이 쉬푸친 아내로 나서고 유치진 김진섭 이헌구 등 말그대로 회원들이 총출동했다. ‘기념제’도 함대훈이 번역,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체홉 작품 상설공연하는 ‘안똔 체홉 극장’
체홉의 인기는 요즘도 여전하다. 작년 5월 국립극단이 명동예술극장에서 올린 ‘벚꽃동산’은 내내 매진이었다. 1년 내내 체홉 작품을 올리는 극장도 있다. 러시아 유학파 출신 연출가 전훈이 이끄는 ‘안똔 체홉 극장’이다. 이 극장은 ‘갈매기’ ‘세자매’ ‘바냐 아저씨’ ‘벚꽃동산’같은 체홉 대표작을 상설 레퍼토리로 공연한다. 지난 달 이 극장에선 체홉 타계 120주년을 기념,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안톤 체홉 학회 결성 10주년 기념을 겸한 행사였다.
‘체홉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만도 나의 행복중의 하나로 헤아릴 것’라고 한 이태준의 고백이 새삼 떠오른다. 이런 작가를 낳은 나라가 요즘은 왜 이럴까 싶기도 하다.
◇참고자료
이효석, ‘나의 수업시대’, 이효석전집 7, 창미사, 2003
김진영, 일본 유학생과 러시아문학: 조선의 1세대 노문학도를 찾아서, 러시아연구 제25권제1호, 2015
오원교, 1920~30년대 한국의 문학 비평에서 체홉, 슬라브연구, 제22권1호, 2006
김병철,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 을유문화사, 1975
유민영,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출판부,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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