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뜨거운 연주를 한다는 것

2024. 2. 1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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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컵 손흥민의 투지처럼
오케스트라 공연 연주자들이
마지막 한음까지 최선 다할 때
음악 공연은 감동으로 다가와

2023 카타르 아시안컵이 막 끝났다. 아쉬움 속에 마무리됐지만, 온갖 고난을 겪으며 토너먼트를 올라갔던 대회라 유독 여운이 길다. 그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8강 한국과 호주의 경기였다. 물론 경기는 답답했다. 한국은 역대 최고의 멤버들로 평가받는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경기를 쉽게 풀어내지 못했다. 우수한 전력과는 별개로 고전의 연속이었다. 한국은 호주에 선제골을 내주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의 수비라인을 뚫어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경기 종료 직전 한국의 주장인 손흥민이 페널티킥을 얻어 내게 된다. 모든 게 극적이었다.

사실 그 후 황희찬 선수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던 것보다 더 마음을 울린 건 손흥민 선수가 보여준 투지였다. 경기 종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축구를 관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포기했던 경기였다. 선수들은 이미 이전 경기까지 풀타임을 뛰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흥민은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적진으로 침투했다. 여러 명의 선수가 달려들어 그를 저지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손흥민은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쓰러지고, 반칙 판정을 얻어 낸다. 감동적이었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디서 느껴본 종류의 감동인데 언제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공연장에서도 느껴 본 감정이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음악을 어떻게든 만들어 보려고 투지를 발휘할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마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손흥민 같은 모습이다. 공연의 감동은 오케스트라의 뛰어난 연주력에서만 나올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다. 성의 없는 연주엔 감동도 따라오지 않는다. 천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든 그건 마찬가지다.

최고의 연주력은 아니어도 최선을 다해 서로가 서로의 소리에 맞추려 하고, 마지막 한 음까지 최선의 결과물을 보여주려 하는 단체의 연주에서 도파민 폭풍이 일어난다. 프로 오케스트라가 아닌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면서도 느꼈던 감동이다. 흔히 경기는 졌지만, 훌륭한 경기 내용을 보여주었을 때 사용하는 말인 ‘졌지만 잘 싸웠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게 아닐까. 결과도 같이 따라오면 더 좋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뜨겁다.

얼마 전 독일 드레스덴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볼 때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인터미션까지 포함하면 장장 5시간이 넘는 공연이다. 연주자들에게도 축구 선수 못지않은 엄청난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연주 내내 그들의 뛰어난 연주력에도 감탄했지만, 마지막 한 음까지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보여주겠다고 분투하는 모습은 더욱 감동이었다.

잠깐 막과 막 사이 휴식시간에 오케스트라 피트로 달려갔다. 오페라 공연에서는 오케스트라가 무대 아래 피트에서 연주하기 때문에 공연 중에는 그들의 모습을 완전히 볼 수 없었다. 시종일관 고개를 돌려 서로의 사인을 확인하고, 열정적인 몸짓으로 연주하는 모습만 겨우 보였다. 대체 무대 아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들렸을까.

피트를 내려다보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광경을 목격했다. 바로 바닥 곳곳에 놓여 있는 포도당 캔디였다. 현악기 연주자들 의자 아래에는 사탕 봉지와 껍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고령의 연주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현악기 단원들은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당을 보충해가며 음악에 임했다. 이들은 음악의 주축을 담당하기 때문에 공연 내내 쉴 틈이 없다. 심지어 휴식시간에도 다음 막을 위해 연습하고 있었다. 그들의 투지 자체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랜 시간 해온 일이라 관습적으로 연주할 법도 한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며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도 오케스트라 피트에 잠시 동안 머물렀다. 연주가 모두 끝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열기가 느껴졌다. 악보들은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고, 칼같이 정렬되어 있던 의자들은 삐뚤삐뚤 흐트러져 있었다. 압도적인 피날레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열정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쉽게 자리를 떠나기 어려웠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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