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열의 산썰(山說)] 21. 눈 쌓인 겨울산에 맨 처음 발자국을 남긴 그는 누구인가

최동열 2024. 2. 1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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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산행을 위해 조건 없이 베푸는 '보시심'을 보다 올 겨울 강원도 산에는 눈이 제법 많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 고산준령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눈부신 나신을 드러내는 장관을 목도하는 것은 겨울 동해안 관광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인 겨울 산을 등산하다 보면, 문득 질문 한가지가 고개를 든다.

그래서 눈 덮인 산에 가장 먼저 길을 내는 누군가는 등산객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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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연이어 내린 폭설로 삼척 쉰움산 정상이 눈에 파묻혀 있다.

■안전한 산행을 위해 조건 없이 베푸는 ‘보시심’을 보다

올 겨울 강원도 산에는 눈이 제법 많다. 최근 수년 간 보기 힘들었던 많은 눈이 1∼2월 사이에 여러 차례 내렸기 때문이다. 지난 15일에도 대설 특보가 내려진 가운데 백두대간 산지와 영동지역을 중심으로 20㎝가 넘는 눈이 내려 더 쌓였다. 덕분에 동해안에서 바라보는 백두대간의 설경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 고산준령이 흰 눈을 뒤집어쓰고 눈부신 나신을 드러내는 장관을 목도하는 것은 겨울 동해안 관광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그냥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지난 설 연휴에 오대산 비로봉(해발 1563m)과 삼척 쉰움산(670m)을 연이어 다녀왔다. 한낮 기온이 겨울답지 않게 따뜻해 상고대를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오랜만에 심설(深雪)이 쌓인 겨울 산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흥겨움이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았다. 겨울 산은 역시 눈을 밟으며 설경을 마주해야 제멋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는 산행이었다.

그렇게 많은 눈이 쌓인 겨울 산을 등산하다 보면, 문득 질문 한가지가 고개를 든다. “폭설이 내린 산길에 맨 먼저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것이다.

▲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등산로에 길을 낸 발자국. 뒤따르는 등산객 입장에서는 선행자의 수고가 고맙기 그지 없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와 마을에 길이 있듯이 산에도 길이 있다. 요즘 웬만한 산은 등산로가 정비돼 있고, 군데군데 길목마다 이정표도 갖춰져 있다. 그러나 폭설이 내려 숲에 많은 눈이 쌓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좁은 숲길에 눈이 쌓이면 어디가 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길을 따라 이동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 눈 밭 위에 서 있는 태백산 천제단. 한겨울 혹한기에 맞서는 기상이 더욱 장쾌하다.

나무 사이 여기도 길인 것 같고, 저기도 길인 것 같은, 아리송하고 난처한 상황에 맞닥뜨리기 십상인 것이다. 심설이 점령한 산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조난 사고로 이어지기에 길을 찾는 것은 산행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눈 덮인 산에 가장 먼저 길을 내는 누군가는 등산객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존재이다. 그 누군가가 있어 뒤를 이어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안전하게 산행을 이어갈 수 있으니, 설산에 길을 내는 그 누군가는 ‘산길 지킴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 태백산의 천제단에서 바라보는 설경. 상고대 너머로 저 멀리 문수봉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의 용틀임이 황홀하다.

그런데 설산에 길을 내려면, 등산로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밤새 눈이 쌓인 산에 가장 먼저 길을 뚫는 사람들은 주로 그 지역 산악회원들이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자기 지역의 산을 찾아오는 등산객들의 안전과 길 안내를 위해 새벽 잠을 설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 두타산 관음암 신도들이 등산로에 쌓인 눈을 치우며 길을 내고 있다.

그렇게 선두에서 눈 쌓인 산에 길을 만들면서 나아가는 것을 등산용어로 ‘러셀(Russel)이라고 한다. 제설차를 만든 미국 회사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눈길 뚫기’나 ‘눈길 헤쳐 나가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많은 눈이 쌓인 산길을 헤치고 나가는 것은 평상시 등산보다 훨씬 힘겨운 일이다. 그래서 러셀 산행은 두 세명 적은 인원으로는 무리이고, 여러 명이 교대로 체력 소모를 줄이면서 하는 것이 요령이다.

산중턱에 암자가 자리잡고 있는 사찰의 경우에는 신도회 회원들이 힘을 모아 울력으로 등산로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경우도 있는데, 설산 산행에 나선 등산객들에게는 이 또한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불교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보시행’, 즉 조건 없이 베푸는 자비심이 눈길 뚫기를 통해 발현되는 것이다.

▲ 오대산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 본 백두대간의 산그리메. 설산의 정상에 올라야 만날 수 있는 겨울 진경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후일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踏雪野中去/不須胡亂行/今日我行跡/遂作後人程)’라는 시가 있다. 또 열매는 딸 때는 그 열매는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생각하라(落實思樹 飮水思源)’는 말도 있다. 거창한 비유 같지만, 설산에 가장 먼저 길을 내는 보시심의 수고 또한 공동체를 위한 미덕이라는 점에서 아름답고 고마운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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