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기자생활] 먼지 쌓인 외장하드 속 외할아버지의 과거

손지민 기자 2024. 2. 1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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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을 앞두고 오래된 외장하드를 꺼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낸 뒤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꽂고 한글파일 하나를 찾았다.

2014년 2월, 정확히 10년 전 작성된 이 한글파일에는 지난해 이맘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당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수업 과제부터 동아리 활동 내용, 자기소개서 등이 잔뜩 쌓인 그 외장하드에서 목적 없이 저장된 파일은 외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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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8일 서대구역에서 시민들이 귀성한 가족을 전화기 카메라로 담고 있다. 연합뉴스

손지민 | 전국팀 기자

이번 설을 앞두고 오래된 외장하드를 꺼냈다. 뽀얗게 쌓인 먼지를 털어낸 뒤 외장하드를 노트북에 꽂고 한글파일 하나를 찾았다. 2014년 2월, 정확히 10년 전 작성된 이 한글파일에는 지난해 이맘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로부터 들은 당신의 청년 시절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대학생 때 “할아버지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하다”며 채근한 뒤 노트북에 열심히 옮겨 담은 내용이다. 수업 과제부터 동아리 활동 내용, 자기소개서 등이 잔뜩 쌓인 그 외장하드에서 목적 없이 저장된 파일은 외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유일했다. 당시엔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적어놔야겠단 단순한 마음이었지만 이달 말 외할아버지의 1주기를 맞아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당시 메모를 열어보면서, 이 기록은 ‘옛날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됐다.

설 연휴 일주일을 앞두고 두서없이 단어와 문장들이 뒤섞인 메모들을 질서정연한 글로 다듬었다. 10년 만에 열어본 한글파일에는 광복과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과 1·4후퇴 등 격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기록부터 고등학생 시절 축구를 하다 대학도 축구 특기로 가고, 군 제대 뒤 친구와 제과공장을 차리는 구상을 하다가, 서독에서 광부로 일한 뒤 미국으로 옮겨 갈 계획을 세웠던 할아버지의 개인사가 오롯이 담겨 있었다. 주름진 얼굴로 스마트폰 사용법을 물어보시던 모습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90년대생 손녀에겐 신기하고 새로운 이야기였다.

“나중에 우리가 쓴 기사도 역사 자료로 활용되는 거 아니야? 이것도 다 기록이잖아.”

3년 전 한 기자 친구가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기자가 쓴 기사는 종이신문이나 온라인 누리집 등에 남아 기록이 된다. 그 대열에 합류해 매일 뭔가 쓰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10년 전 적어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며,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했던 그 시절을 상상하고, 외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는지 재구성하고, 함께 보냈던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은 좀 더 자세히 들어볼걸, 이런 것도 물어볼걸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렇게라도 기록해둬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컸다.

가족을 기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취재원을 대할 때와는 다른 민망함과 머쓱함이 밀려오면서 온몸이 오그라든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에 관한 기록을 다시 쓰고 있다고 말했을 때, 주변에서는 격려하거나 자신도 해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았다. “어떻게 시작해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우려가 이어졌지만 말이다. 자신의 어머니 인터뷰집을 어머니 빈소에 모셔두고, 과제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해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설 연휴 때는 외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 어린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짧은 추억을 이야기하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에겐 할머니인 존재가 누군가의 딸로서 애틋하면서도 앳된 삶을 살아왔음을 새삼 깨달았다. 무언가 공유의 계기가 되는 기록, 또 그에 바탕한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느낄 수 있었다. 기록하는 직업을 가진지라 명절을 맞아 유난을 떤 듯도 하지만, 누구든 다음 명절에 가까운 가족을 앞에 두고 노트북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 마음에 평생 남을 소중한 기록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sj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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