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게인 이창호 상하이 대첩’ 출격…신진서 “부담은 없다”

2024. 2. 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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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걸림돌은 ‘체력 관리’
연승 시 농심배 5일 연속 대국 강행군
일본-중국 선수에 앞선 상대전적에 기대
신진서(오른쪽) 9단이 지난해 12월 부산 호텔농심에서 열렸던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의 셰얼하오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신 9단은 이 경기에서 이번 농심배에서만 7연승을 달려왔던 셰얼하오 9단에게 133수 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한국기원 제공

“부담은 없다.”

패기는 충만했다. 마지막 ‘태극마크’ 주자로 남겨지면서 주어진 심리적인 압박감이 상당할 법도 했지만 그런 흔적을 찾아보긴 어려웠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수적인 열세 속에 치열하게 전개될 세기의 반상(盤上) 전투를 앞두고 내비친 그의 각오다. 19일부터 중국에서 펼쳐질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우승상금 5억 원)’에 한국 대표로 출전 중인 신진서(24) 9단의 의미심장한 출사표다. 농심배를 사흘 앞둔 16일 “이창호(49) 9단의 유명한 ‘상하이 대첩(2005년)’이 연상되는데 괜찮은가?”란 질문에 “농심배에선 충분히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며 망설임 없이 돌아온 세계 랭킹 1위 신 9단의 다부진 답변이다.

농심배는 한국엔 각별한 대회다. 특히 이창호 9단의 막판 ‘원맨쇼’로 대미를 장식했던 지난 2005년 농심배는 아직도 바둑계에선 '넘사벽 상하이 대첩' 드라마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단기필마로 나섰던 이창호 9단은 2명의 일본 대표와 3명의 중국 기사에게 연거푸 5연승, 상하이에서 전대미문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 일화는 한 케이블 방송 드라마에서도 재현, 시청자들로부터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국내·외 바둑계의 유일한 국가대항전인 농심배는 한·중·일 각 나라에서 뽑힌 5명의 선수가 팀을 구성, 연승전 형태로 진행된다.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이번 농심배엔 현재 중국에선 구쯔하오(26) 9단과 커제(27) 9단, 딩하오(24) 9단, 자오천위(25) 9단이 생존한 가운데 일본에선 이야마 유타(35) 9단이, 한국에선 신 9단이 마지막 보루로 남았다. 한국 대표로 출전했던 박정환(31) 9단과 변상일(27) 9단, 설현준(25) 9단, 원성진(39) 9단 등은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일찌감치 짐을 쌌다. 일본에서 또한 이치리키 료(27) 9단과 시바노 도라마루(27) 9단, 위정치(29) 8단, 쉬자위안(27) 9단 등이 나왔지만 모두 탈락했다.


살인적인 5일 연속 농심배 대국 일정…최정상급 중국 선수들도 줄줄이 대기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나선 중국 대표팀은 화려한 진용으로 구성됐다. 맨 왼쪽부터 커제 9단, 구쯔하오 9단, 셰얼하오 9단, 자오천위 9단, 딩하오 9단. 한국기원 제공

신 9단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큰 걸림돌은 체력이다. 현재 중국갑조리그바둑에도 용병으로 참가 중인 신 9단은 공개 석상에서조차 “요즘 체력적으로 좀 힘이 든다”고 토로할 만큼, 빡빡한 일정에 따른 피로감을 호소할 정도다. 살인적인 일정으로 짜인 농심배가 신 9단 입장에선 버거울 수밖에 없다. 만약 신 9단이 연승을 이어간다고 가정하면 19일부터 23일까지 최정상급 기사들을 상대로 매일 진검승부에 나서야 할 판이다. 신 9단에게 농심배에 대한 대비책을 묻자, 상대 선수들에 대한 전력 분석 등에 앞서 “푹 쉬면서 지내고 있다”고 전한 이유도 이런 정황을 염두에 둔 답변으로 읽혔다. 신 9단이 최근 바둑국가대표팀에서 스스로 나온 배경도 같은 맥락이다. 신 9단도 “시합이 너무 많아서 국가대표팀 내 리그전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했다”고 귀띔했다.

물론, 신 9단을 기다리고 있는 최정상급 기사들의 면면 또한 만만치 않다. 지난해 12월, 이번 농심배에서만 7연승을 달려왔던 중국 셰얼하오(26) 9단의 질주를 중단시켰지만 줄줄이 대기 중인 상대들의 화력 또한 막강하다. 셰얼하오 9단에게 승리 직후 “보통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려면 다섯 판은 두어야 하는데 지금 농심배의 남은 판이 다섯 판이다"라며 "세계대회 첫판이라는 마음으로 한 판 한 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힌 신 9단의 소감도 이런 정황들이 감안된 다짐으로 들렸다.

긴장감은 이미 끌어올린 상태다. 신 9단은 “우선, (19일에) 가장 먼저 만날 이야마 유타 9단부터 조심해야 한다”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야마 유타 9단은 한때(2017년) 자국 내 메이저 타이틀 7개(기성전, 십단전, 본인방전, 소기성전, 명인전, 왕좌전, 천원전)를 한꺼번에 싹쓸이했던 일본 바둑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기다리는 중국 선수들의 면면 역시 화려하다. 신 9단도 “(남은) 중국 선수들은 거의 비슷하다”면서도 “워낙 실력이 강한 선수들이어서 준비를 잘해야 될 것 같다”고 전의를 다졌다. 올해 2월 기준, 자국 내 랭킹 1위인 구쯔하오 9단은 현재 프로바둑 기사 중에선 신 9단에게 가장 위협적인 기사다. 지난해 6월, 신생 세계 메이저 기전으로 열렸던 ‘제1회 취저우 란커배 세계바둑오픈전’에서 신 9단에게 1국을 내주고도 2, 3국을 잇따라 가져가면서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커제 9단은 2010년대 중·후반 삼성화재배와 몽백합배, 신아오배, 백령배 등을 포함한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만 8개의 우승 트로피 수집으로 세계 바둑계를 제패했던 거물이다. 최전성기에선 벗어난 모습이지만 자국 내 랭킹 2위인 커제 9단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딩하오 9단은 지난해에만 세계 메이저 기전인 ‘삼성화재배’와 ‘LG배 기왕전’ 타이틀을 동시에 획득, 초일류 반열에 합류한 기사다. 자오천위 9단도 주요 세계대회 본선에 꾸준하게 명함을 내밀고 있는 요주의 대상이다.


물오른 신 9단, 동기부여도 충분…밀레니엄 세대 새 역사도 가능

지난 1999년부터 한중일 3개국이 참여한 국가대항전으로 창설된 농심배에서 한국은 지난해 대회까지 총 15차례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바둑TV 캡처

하지만 신 9단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다. 일단 기세부터 위풍당당이다. 신 9단 소유의 현재 국내외 타이틀은 지난해 수집한 7개(응씨배, 명인전,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 KBS바둑왕전, 용성전, 맥심커피배, YK건기배)에 이어 지난달 LG배까지 더해지면서 총 8개까지 늘었다. 새해 전적도 14승 1패(승률 93.3%)로 산뜻하다. 연간 90%대 승률 달성에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신 9단에겐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인간계에선 인공지능(AI)과 가장 유사한 행마를 구사한다는 의미로 신 9단에게 붙여진 ‘신공지능’에 부합된 성적표다. 신 9단은 지난해 112승 15패로 마감, 88.2%의 승률을 기록했다.

이번 농심배에서 맞대결을 펼칠 경쟁자들과 가진 양호한 상대전적 또한 플러스 요인이다. 신 9단은 일본 이야마 유타 9단에겐 2승 무패를 챙긴 가운데 중국 구쯔하오 9단(9승 6패)과 커제(11승 11패), 딩하오(6승 3패), 자오천위(6승 1패) 등에게 밀리지 않고 있다. 상대전적에서 동률인 커제 9단의 경우엔 지난 2021년 5월에 벌어졌던 중국갑조리그바둑에서 패한 이후, 6연승을 이어가고 있다. 바둑계 내에서 동률인 두 선수의 상대전적에도 불구하고 “신 9단과 커제 9단의 격차는 이제 상당히 벌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유다.

농심배와 이어지고 있는 특별한 인연 역시 긍정적이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최종 주자로 나서면서 한국팀에 우승 트로피를 가져온 수호신이 신 9단이다. 덕분에 지난 1999년 농심배가 창설된 이후, 단 한 차례도 최하위로 마감했던 경험이 없었던 사례도 연장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은 지금까지 24번의 농심배에서 15차례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특히 농심배에서 신 9단의 브레이크는 고장난 상태다. 신 9단의 농심배 전적은 11승 2패인데, 현재 11연승 중이다. 만약 이번 대회에서 5연승을 몰아칠 경우, 16연승의 대기록 작성까지 가능하다. 한국 바둑의 살아 있는 전설인 이창호 9단의 농심배 14연승 기록까지 갈아치우면서 우승 트로피까지 거머쥘 수 있는 상황이다. 이창호 9단이 19년 전, 세웠던 상하이 대첩보다 더 드라마틱한 시나리오의 농심배 대역전 드라마 작성도 가능하단 얘기다. 신 9단이 우상처럼 추앙해온 이창호 9단의 농심배 족적을 경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어려운 반상 국면임엔 틀림없지만, 그만큼 이번 농심배에서 신 9단의 집중력이 최대치로 발휘될 수 있는 동기부여도 충분하다. 신 9단은 평소 “존경하는 선배인 데다, 바둑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창호 9단이다”라고 강조해왔다.

신 9단은 올해 목표치도 제시했다. “농심배를 포함해서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 2개 우승과 추가로 다른 세계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하면 만족할 것 같습니다.” 이창호 9단의 ‘상하이 대첩’을 넘어설 밀레니엄(2000년대생)세대 신 9단의 ‘어게인 상하이 대첩’ 새판짜기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

허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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