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실 살핀 의대 증원인가?…단계적 증원으로 타협 이뤄야

한겨레 2024. 2. 1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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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료진 모습. 연합뉴스

[왜냐면] 최용준│한림대 의대 교수

지난 6일 정부는 내년부터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천명 더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정원이 3058명이므로 한 번에 65%가 늘어나는 셈이다. 전례 없는 규모의 일시 증원이다. 의학 교육 현장의 혼선과 부담은 불 보듯 뻔하다. 거칠게 말한다면 65%가량의 의학 교육 질 저하는 불가피하다. 증원 정책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오늘날 의학 교육 현장에서는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임상 의학을 가르치고 실습을 지도할 임상 교수가 현장을 떠나고 있다. 기초 의학 교수가 부족한 대학도 많다. 대학이 채용 공고를 내더라도 적합한 지원자를 구하기 어렵다. 경상의대 서지현 교수 등이 2022년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면, 2020년 설문에 응한 전국 의대 교수 855명 가운데 34%가 감정 소진을, 66%가 냉소주의를, 92%가 성취감 결여를 경험하고 있었다. 48%는 퇴직을 생각한 적이 있었고, 자살 생각을 해 본 교수도 8%나 되었다. 실제로 임상 현장에서는 진료와 연구의 압력 때문에 교육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대학이나 병원이 교육의 가치를 높게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에 헌신적인 교수들은 번아웃에 빠지고 그 가운데 일부는 병원을 그만둔다. 교육과 연구를 안 해도 되는 ‘진료 교수’로 신분을 바꾸기도 한다. 이런 양상은 젊은 교수들에게서 두드러진다고 한다. 지방 의대일수록 사정은 심각하다. 의학 교육자들의 상태가 이럴진대 정원의 65%가 일시 증원된다면 과연 의학 교육은 어떻게 될까?

정부와 대학, 의료계가 모두 한 걸음씩 물러나 정책 조율에 힘을 모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장기적인 정책을 고민하고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정부의 처지를 이해한다. 그러나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 교육 현장의 사정을 고려해 증원을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 구체적인 의학 교육 정책이나 투자 계획도 필요하다.

대학의 노력도 절실하다. 지난해 10~11월 있었던 의대 정원 수요 조사 결과는 과장된 면이 있었다. 짧은 기간 조사에 응하다 보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대학은 이번이 아니면 정원을 늘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현실적인 수용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교수가 없어서 다른 대학에서 교수를 빌려 와서야 되겠는가? 시설 부족으로 학생들이 강의실 복도에 보조 의자를 놓고 수업을 듣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의학 교육을 수십 년 전으로 후퇴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의사협회를 비롯한 의료계도 한 걸음 물러서면 좋겠다. 의대 증원만으로 필수 의료나 지역 의료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일방통행식 정부 발표의 문제점 지적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적정 증원 규모를 먼저 제안하고 적극적으로 협상할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의대 증원은 증원대로, 필수·지역 의료 발전 방안은 그것대로 논의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정부에 의대 증원 정책의 속도 조절을 주문하고 증원에 따른 구체적 대책을 주문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의료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이해당사자가 한목소리로 의대 증원에 찬성하는 이유도 생각해 봤으면 한다. 논조와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의대 정원 증원 발표 직후 나온 10대 종합 일간지 사설 가운데 증원 자체에 반대한 경우는 없었다. 의대 증원이 필수·지역의료 강화로 자동적으로 이어진다는 나이브(순진)한 주장도 아니었다. 의료계도 의사 아닌 다른 사회 구성원의 시각에서 정책을 바라봤으면 한다.

정치의 역할이 절실하다. 정책 당사자 간 갈등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필요한 것이 정치다. 정부와 의료계가 강 대 강으로 맞서기 전에 정치가 조정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한다. 운동권 정치 청산을 주장하는 여당이든, 정권 심판을 내건 야당이든, 거대 양당을 비판하는 제3의 정당이든 내일을 위한 공약보다 지금 당장의 실력을 보여주면 좋겠다. 이것이 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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