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가끔은 길을 잃어도 좋아
차에 타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부터 입력한다. 지금은 내비게이션 없는 운전을 상상도 못하지만, 오래전엔 지도책을 들고 여행을 떠났다. 대학 시절 답사부장이 되어 한국미술답사를 준비하면서 운영비로 가장 먼저 산 것은 선배들이 추천한 최신 지도책이었다. 문화재 목록과 지도책을 번갈아 보며 코스를 짰고, 친구들과 미리 사전답사를 떠나 지형지물과 도로를 살피고 기록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빠른 속도의 시대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최적의 경로를 따라 출발지에서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한다. 누구나 시간이 부족하기에 최적의 효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결과를 향해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는 건 운전만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하는 방법’을 먼저 검색하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후기와 평점부터 찾는다. 심지어 아이들마저 골목을 뛰어다니며 노는 대신, 확실하고 안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체험놀이시설에 간다. 이제 누구도 길을 잃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시작과 끝만 있는 납작한 세계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은 책 ‘길잃기 안내서’에서, 길잃기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자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라고 했다. 오래 전의 답사에서 목적지였던 사찰과 탑도 아름다웠지만, 길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친 것들도 매우 인상 깊었다. 초여름에만 볼 수 있는 연초록색 논, 좁은 시골길을 기가 막히게 통과하는 버스 기사님의 연륜처럼 지도에 없는 것들이 내 기억의 지도에 새겨졌다.
그러고 보면 도서관의 서가를 헤매다 발견한 책이 ‘인생 책’이 되었고, 여행지에서 계획 없이 걷다 발견한 식당이 가장 맛있었다. 의미가 불확실한 예술 작품 앞에서 고민하다가 삶의 해답을 찾은 적도 있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헤맬 때에만 만날 수 있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 풍성한 과정을 통과하면 우리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한 지금을 받아들이고 과정을 탐색하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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