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빅텐트

한겨레 2024. 2. 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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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미래 이낙연 공동대표,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 원칙과상식 조응천 의원, 새로운선택 금태섭 공동대표 등이 지난 9일 오전 서울 용산역에서 설 귀성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정희원 |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교수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대한민국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온 정치인이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말이다. 그런 이준석을 중심으로 정치인들이 ‘빅텐트’를 쳤다. 그새 정강정책과 노선에 합의가 이뤄졌고, “몇몇 사소한 내용”만 논의하면 된다고 한다. 특히 이 대표에 따르면 합당 과정에서 기존 정책은 쟁점이 아니었으며, 이미 발표한 정책에 대해서는 상호 존중하기로 했단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개혁신당은 경찰·해양경찰·소방·교정 공무원으로 지원하려는 여성들에게 병역을 의무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하필이면 네가지 직군을 콕 집어서 군필자만 신규 채용에 응시할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을 보며 실소가 나왔다. 개혁신당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젠더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성차별적 문화를 얼마나 악화시킬지 극명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경찰·해양경찰·소방·교정 공무원은 ‘남성적’ 직업, 즉 관습적인 ‘남성성’과 긴밀하게 엮여 있다고 여겨지는 직군에 속한다.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고정관념이지만, 이런 젠더 인식은 지난 수년간 백래시에 힘입어 오히려 빠르게 퍼졌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최근 득세한 ‘여경 무용론’이다. 문자 그대로 여성은 경찰로서 쓸모가 없고 방해가 될 뿐이며, 현장에서 뛰려면 역시 남자가 낫다는 주장이다. 그 결과 여경들은 조롱과 비하가 섞인 발언을 들으며 일해야 한다. 이런 폭력을 감내하면서도 경찰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을 되찾아야 하는 수고는 온전히 여경들의 몫이다.

“경찰이나 소방관이 되고 싶으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정책은 실질적인 병역자원 확보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 공약은 변화한 환경에 걸맞은 병역제도 개선, 인구 감소에 대응하는 병역자원 확충과 같은 근본적 의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제도가 정착되면 한가지 영역에서는 그 효과가 확실할 것이다. 바로 차별의 국가 공인이다.

첫째, 관습적·이분법적 젠더 위계가 특정 직군(“남자의 일!”)과 결합한다. 자신들이 보기에 ‘남성적’인 분야에서 일하려면 다른 비장애 남성들처럼 ‘군필자’의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는 정책은 결국 해당 업무는 ‘특정한 몸’들에게만 적합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는 직군이 아닌 것이다.

둘째, 병역 의무를 완수하지 않은 여성은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으므로 전통적 성별 분업이 강화된다. 여성들이 군 복무를 포기한다면 해당 직종은 지금보다 남성 비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고, 반대로 여성들이 군대에 간다면 해당 직무수행 능력이 본질적으로 군 복무 경험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 대표는 “군 복무를 자발적으로 한 진정성 있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병역을 기준으로 ‘1등 시민’과 그렇지 못한 시민을 가르는 주장이다. 결국 비장애 남성의 몸이 국가로부터 대접받는 ‘모범적인 몸’이 될 것이다.

이 정책은 차별 그 자체다. 병역 제도 혁신에 대한 관심보다는 ‘남성적’인 공무원 직종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역차별’을 해소하고 싶어서? 이런 기조는 합당 뒤에도 그대로 이어질 모양이다. 이기인 대변인은 “페미니즘의 문제는 그저 성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가치를 둘러싼 중차대한 전쟁”이라며 “이 깃발을 치열하게 사수”하겠다면서 지지자 달래기에 나섰다. 이 대표 역시 합당으로 인해 기존 공약이나 노선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유사한 정책들이 현실화하면 한국 사회, 특히 젊은 세대의 젠더 인식은 크게 후퇴할 것이다.

‘빅텐트’에 여성, 퀴어, 장애인, 노인의 자리는 있을까. 혹시 그들은 양당 정치를 타도해야 한다는 막중한 과제 앞에 이 모든 것은 사소한 일이라고 말할까? ‘대의’를 위해 여자들은 잠깐 텐트 밖으로 나가 있어야 할까. 이것은 우리가 반복해서 들었던 대답이기에, 자연히 우리는 그다음에 벌어질 일도 알고 있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대변하지 않으리라는, 우리는 결정적 순간에 항상 우선순위 밖으로 밀려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준석의 눈치를 보는 소위 ‘제3지대’는 여성들의 깊은 실망을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차피 텐트 안에 내 자리가 없는데, 그 텐트를 지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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