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3주기 공모전 우수상] “착각들 하지 마라” 질타하시던 불쌈선생님 그립습니다
김윤 | 고 김규동 시인 장남
“착각들 하지 마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안에 쨍 울렸다. 지난 1985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우리 선친의 회갑 축하 모임 자리로 여러 문인이 좌중에 있었다. 축사를 위해 앞에 나온 백기완 선생이 인사말도 하기 전에 던지신 질타의 언어였다. 좌중의 문인 제위에게 ‘잔학한 군부 독재정권에 맞서는 방식이 원고지로 몇 자 적는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라는 불쌈꾼다우신, 벽력같은 그야말로 사자후였으니, 방안에 서릿발 긴장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그 날, 다른 어떤 부드러운 말씀을 축의로 주셨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복과 백발 부스스하게 솟아오른 선생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백 선생의 축사 순서에 앞서 연단에 올랐던 정한모 원로시인이 축하의 말씀을 하시는 중에 박태순 소설가가 갑작스레 “집어쳐라”고 고함을 이미 치셨기 때문에(나중에 알고 보니 정한모 원로시인이 독재정권 밑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직을 맡고 있으신 데 대한 날 선 비판이었던 모양이다)그렇지 않아도 경색되었던 그 날 분위기에, 선친을 위한 회갑 모임이라 듣고 귀퉁이에 앉아있던 장남인 나는 일말의 당혹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한다고 몇 년 동안 외국에서 체류하다 일시 귀국해 자리에 참여한 참이어서 “축하 모임으로는 모양새가 살벌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중에야 연행, 구속, 고문, 실종, 분신, 강제징집, 의문사 등 당시 국내의 탄압과 차가운 현실에 맞서는 이들의 용기와 두려움을 함께 느끼고서야, 그날 모임의 날카로움을 이해했다. 외국에서 뉴스로만 보았던 국내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다. 말 그대로 ‘산 자여 따르라’는 저항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러 해 뒤, 선생이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 때 방송사 정견 발표에 나와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노태우 일파의 처리에 대해 “죽여야 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모른다. 아내와 어린 딸들을 데리고 서울 동성로의 선거 유세장에 갔던 기억이 남아있다.
선생과의 개인적 대면은 우리 선친이 ‘통일 염원 시각전’이라고 해서 시구를 목판에 새긴 서각 작품의 전시회를 열었을 때, 선친의 시 ‘죽여주옵소서’를 새긴 작품을 통일문제연구소에 가져다 드리면서 뵈었을 때였다. 몇 마디 격려 말씀을 해주시는 선생이 어려워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가, 뭔가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제가 경영 컨설턴트의 일을 하고 있는데 혹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올렸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참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드린 것 같았다. 경영 컨설턴트란 개괄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노동자를 위해 싸우는 선생에게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 생각해도 낯 뜨겁다.
선친 별세 뒤, 기념문집을 낼 때 선친의 시 ‘죽여주옵소서’에 부쳐 추모의 글을 정겹게 써주셨는데, 원고를 받으러 간 내게 통일문제연구소 입구에 걸린 ‘죽여주옵소서’ 서각을 몸소 보여주면서 열혈 청년들이 방문할 때마다 시구에 담긴 통일 염원의 절절함과 아울러 “이런 시인이 계시다”며 소개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제 선생이 떠나신 지 3년, 장례식장 계단에 촘촘히 붙어 반짝이던 색색 리본들이 떠오른다. 많고 많은 청년이 선생의 뜻을 기려 붙인 것들이었다. 선생이 그만큼 앞선 발걸음과 투쟁의 생애를 보내셨는데…. 후진으로서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커진다.
생전에 장산곶매의 신명 나고 가슴 서늘하게 뛰는 민족의 서사를 들려주셨는데, 아마 지금은 황해도 해안 절벽 위를 아득히 높이 날며 북쪽의 해안 포대를 내려다보고서 “동족에게 절대 포탄을 날리지 마라, 혈육이 민족이고 민족이 통일이다”라고 하실 것 같다.
다시 없는 혁명가로서 시인으로서 통일운동가로서 우리 옆에 계셨던 큰 어른이 이제 안 계시니 다음 세대가 할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불쌈선생님, 그 모습이 세태의 겨울날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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