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 3주기 공모전 최우수상] 한 사람의 말에 전교생이 일어나 거리로 나선 그 날

한겨레 2024. 2. 1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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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노천강당에서 강연이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님의 말씀에 학생들의 몰입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 순간 “일어나라~ 청년 학생들이여~!” 선생님의 사자후가 터지자마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학생들이 우다다다 전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뒤쪽에 앉아있던 나는 그 전체 장면을 볼 수 있었기에 충격이 정말 컸다
사자후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거리로 나가 싸워야 한다! 나가라! 학우들이여~”

15일 영원한 니나(민중)의 벗이자 불쌈꾼(혁명가)이었던 고 백기완 선생 3주기를 맞아 백기완노나메기재단과 한겨레신문사는 생전 백 선생과 얽힌 독자들의 추억과 인연을 담은 글을 지난달 31일까지 공모했다. 심사를 거쳐 최우수상 2편과 우수상 2편, 입선 3편을 선정했다. 최우수상과 우수상 수상작 두편씩을 15일과 23일 두차례에 걸쳐 나눠 싣는다.

1987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고 백기완 선생이 연설하고 있다.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지민주 | 노동가수

기억 하나.

1992년 민중 대통령 후보로 백기완 선생님이 추대되셨다. 당시 나는 대학교에서 노래패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민중후보 학생문예단에서 함께할 기회가 생겼다. 백 선생님이 자주 오시지 못하는 대구·경북 지역의 여러 곳을 노래로 선동하는 역할이었지만 노래뿐만이 아니라 새벽에 공단에 가서 선거 리플렛을 돌리기도 했다. 너무 추워서 하기 싫었는데 선배들과 후배들의 눈치가 보여서 했다.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으로는 학내 식당 앞에서 귤 팔기 등 지금 생각해보면 ‘참 착실하게 학생운동을 했던 참한 학생이었다’고 생각하겠지만 큰 반전이 내겐 있었다.

어느 날 대표 격인 선배가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백 선생님의 선거 유세가 크게 있다고 우리도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선생님의 연설을 드디어 직관하는구나! 유세 시간을 맞추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서 동아리연합회에서 버스를 빌려 노래패, 풍물패, 글패 등 운동권 동아리 학생들을 몽땅 태워 서울로 향했다. 당시 인기 있던 ‘민중권력 쟁취가’ ‘민중의 노래’ 등 민중가요를 버스가 떠나가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신나게 올라갔다. 서울에 들어오니 한강이 보였다. 우리의 원래 목적인 선거 유세를 잊어버린 채 모두 지쳐 보라매공원에 도착할 때는 말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날 참 추웠다. 땅이 얼어서 공원 곳곳에 빙판까지 보였고 제대로 된 방한용품도 없이 민중후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백 선생님 언제 오세요?”

“나도 몰라 곧 오시겠지.”

“너무 추워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야! 백 선생님은 한복 입고 다니시는데 젊은 우리가 이 정도 추위에 뭘 그렇게 떠드냐!”

한 살 많은 선배한테 힘들다 얘기했다가 욕만 먹고 조용히 2시간을 그렇게 덜덜 떨었던 것 같다. 너무 추워서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백 선생님은 여전히 무대 위로 올라오시지 않았고 나는 화장실을 간다 하고 보라매공원인지 보라매병원인지 화장실로 향했다.

아, 따뜻해. 몸에 퍼지는 온기에 순간적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화장실 바닥에 누군가가 종이 박스를 깔아 놓았다. 거기에 잠깐 앉았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나 보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눈을 떠보니 사방이 깜깜했다. 겨울이어서 해가 빨리 진다 해도 느낌상 서너 시간이 지난 거 같았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밖으로 뛰어나오니 무대가 있던 공간엔 무대는 사라지고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나를 태우고 온 버스도 없었다.

아, 낙오되었구나. 전화기도 없고 돈도 없고 멍하니 공원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다행히 서울에 친구들이 있어 자취하는 중학 동창 집에서 하루를 묵을 수는 있었지만 내려가서 얼마나 선배들한테 야단을 맞았는지 모른다. 너는 도대체 서울을 왜 간 거냐고! 잠자러 갔느냐고! 나중에 사람들이 보라매공원 유세를 보고 와서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을 때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발이 얼어버린 추위, 따뜻한 화장실의 히터 그리고 아무도 없던 까만 보라매공원은 유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기에…. 그러게 내가 그날 왜 간 걸까?

나중에 자주 백 선생님을 뵙게 될 때면 가끔 그 날이 떠올랐다. 20대 초반 어린 학생이 민중권력 쟁취가를 야무지게 불러보겠다며 선생님 한번 보러 갔다가 얼굴을 뵙기는커녕 화장실 바닥에서 잠만 잤던 그 날이 떠올라 혼자 민망해했다.

그때 부르지 못한 노래들은 30년이 지난 지금껏 나는 세상을 향해 부르고 있으니 괜찮다. 그리고 어느 순간순간에, 하물며 선생님이 객석 맨 앞자리에 앉아 계실 때도 잦았으니 원은 없다.

근데 선생님, 그때 왜 늦게 오셨어요?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기억 둘.

대학 새내기 때였다. 우리 학교에 백 선생님 초청 강연회가 있다는 소식이 담긴 대자보가 학교 앞에 붙어있었다. 우와 드디어 가까이서 백기완 선생님을 볼 수 있겠구나. 기억으로는 학생총회에 이어 선생님의 특별 강연이 있었던 거 같다. 우리 학교는 내가 입학할 때부터 학원 자주화 투쟁이 무척 활발했다. 당시 이사장이 박근혜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그래서 총학생회는 학기 시작과 동시에 무척이나 전투적으로 싸웠고 학장실 점거는 거의 월례 행사였다. 전대협의 대의원이었던 총학생회장은 수배로 학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학생총회의 내용은 당연히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백 선생님 때문이다.

노천강당이 꽤 컸는데 학생들이 꽉 찼다. 무대 위로 한복인지 민복을 입으신 선생님께서 올라오셔서 뭐라 뭐라 얘기를 하셨는데 정확하진 않지만 청년 학생들의 자리와 자세 그런 거였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지거나 민중이 힘들 때 청년들의 투쟁이 있었으니 자네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내용인 거 같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노천강당에서 강연이 후반부로 갈수록 선생님의 말씀에 학생들의 몰입은 극으로 치달았다. 그 순간 “일어나라~ 청년 학생들이여~!” 선생님의 사자후가 터지자마자 집단 최면에 걸린 듯 학생들이 우다다다 전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뒤쪽에 앉아있던 나는 그 전체 장면을 볼 수 있었기에 충격이 정말 컸다. 사자후는 계속 이어졌다. “이제 거리로 나가 싸워야 한다! 나가라! 학우들이여~.”

데모에 적극적이지 않던 음대생들도 선생님 강의는 들으러 오는 당시 분위기여서 하이힐을 신고 있던 여학생들도 매우 많았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 강의를 들으러 왔다가 그 불편한 신발을 신고 경산역까지 행진한 것이다. 거리로 따지면 3~4㎞는 족히 되었을 텐데 비까지 오는 날 거의 전교생이 가두시위에 나선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에서 경산 시내를 나가려면 경찰 기동대를 지나가야 하는데 보통 때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면 기동대가 최루탄, 지랄탄을 쏘고 막는 게 ‘국룰’(모두가 지키는 규칙)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끝없은 학생대열에 기가 눌려 기동대가 나오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가장 앞자리에 펼침막을 들고 섰던 사람은 수배로 학교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던 총학생회장이었다. 수배자가 기동대와 경찰들 눈앞을 지나가도 그들은 총학생회장을 잡아갈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끝없이 나오는 대오는 그들에겐 공포였을 테니까 말이다. 나중에 그날의 무용담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대열 선두가 경산시장쯤을 지날 때도 학생들이 학교를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원래 무용담이란 게 조금은 부풀리는 거 아니겠는가.

나도 신나게 걸어서 경산역까지는 갔는데 비도 맞고 발이 너무 아파서 돌아올 땐 버스를 탄 거 같다. 물론, 당시 사회 분위기와 학교의 특성상 시위가 지금보다는 훨씬 대중적인 건 맞지만 한 사람의 말에 전교생이 일어나 불편한 신발을 마다치 않고 몇 ㎞를 걸어간 건 지금 생각해봐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몇 달을 밖으로 못 나온 총학생회장의 환한 얼굴과 팔뚝질을 하며 구호를 외치는 모습이 생각난다. 학우들이 모두 일어나니 공권력도 어찌할 수 없던 그 날.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이 총파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함께 일어나 싸우니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던 날, 우린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같이 구호를 외치고 걸어갔을 뿐이었다. 수많은 날 중 왜 그 날 비로소 그런 일이 만들어졌을까. 열심히 투쟁했던 학생들과 민중들의 가슴에 늘 불씨를 심어주시던 백 선생님의 멋진 ‘콜라보’(협업)가 아니었을까. 비를 맞으며 학생들과 끝까지 함께 먼 길을 걸어주신 선생님. 말과 행동이 같으셨던 분. 얼마 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갔다가 그 수 십년 전 이야기를 선생님 무덤 앞에서 했는데….

선생님! 기억나세요? 생각해보니 그때 선생님 50대셨어요. 제가 본 백 선생님은 그날 참석한 어떤 학생들보다 더 푸르른 젊음을 포효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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