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위기' 속 첫 시집 펴낸 젊은 시인들…"쓰다 보니 시인이 됐다"

전혼잎 2024. 2. 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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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낸 고선경·변혜지·유수연
웹시집 발표 계미현 등 MZ 시인들
지난해 첫 작품을 펴낸 시인들의 시집들. (왼쪽부터) 고선경 시인의 '샤워젤과 소다수', 변혜지 시인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유수연 시인의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문학동네·문학과지성사·창비 제공

‘시의 위기’라고 그 누구도 말하지 않는 시대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해서다.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시를 선호하는 성인 독자는 단 3.4%(종이책 기준)였다. 재테크 책, 자기계발서는 물론이고 철학서, 역사서, 요리책보다도 적은 수치다. 그럼에도 인류 최초의 문학으로 삶을 보듬어온 시는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지금도 누군가는 읽고 또 누군가는 쓰기에.

한국일보는 지난해 첫 시집을 낸 고선경(‘샤워젤과 소다수’), 변혜지(‘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유수연(‘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 시인과 웹시집(‘현 가의 몰락’)을 발표한 계미현 시인을 서면으로 만났다. 모두 20~30대의 이른바 MZ세대(1980년대~2000년대 초반 출생)인 이들에게 ‘왜 시를 쓰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첫 시집으로 새로운 세계를 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를 쓰다 보니 시인이 됐다”

변혜지 시인. 본인 제공

변 시인은 “친구와 놀기 위해서” 시인이 됐다. 중학생 때 우연히 글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계속 함께 시간을 보내려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것. 친구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했다면 그걸 따라서 했을 것이란다. 2021년 등단한 그는 “시를 쓰는 일은 해석하는 일”이라면서 “시를 쓸 때면 잊었던 영어 단어를 떠올리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복습하는 느낌이 든다”고 전했다.

대학에서 소설을 전공한 고 시인은 "시는 제가 할 수 없는 것, 먼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면서 “멀게 느껴져서 오히려 더 매혹적이었다”고 말했다. “시인이 되었다기보다는 시인을 하게 되었단 게 맞을 것 같다”는 유 시인과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시를 썼다기보다는 시를 쓰다 보니 시인이 됐다”는 계 시인은 시작(詩作)의 천연성에 대해 말했다.


동시대 사는 젊은 시인들의 시

고선경 시인. 본인 제공

젊은 시인들의 시는 동시대를 벼린다. ‘선배에게 얻어터진 다음 날에는 모든 동급생이 나를 피했다/나는 가해자가 아니야…(중략) 나는 살아남아/시인이 됐다/처음으로/뭔가가 되어봤다’(‘숨어 듣는 명곡’)라는 고 시인의 시에는 학교폭력이 담겼다. 그는 실제로 겪은 학교폭력으로 무력함을 느끼던 자신에게 ‘넌 언젠가 시인이 될 것’이라는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했다. 고 시인의 시에선 투룸 신축 빌라라는 거주 환경,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사는 화자 등 오늘의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이들은 웹소설을 시의 전경으로 삼거나 웹시집을 펴내는 등 이전엔 없던 길을 만들기도 한다. 변 시인의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유명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에 등장하는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고, 시의 세계관 역시 판타지다. 그는 “웹소설 속 인물이 가진 고민이나 맥락이 제 작품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웹소설 작가에게 직접 허락을 구하는 과정을 거친 그는 첫 시집을 ‘전지적 독자 시점’의 싱숑 작가에게 가장 먼저 보냈다.

계미현 시인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웹시집 '현 가의 몰락'의 첫 화면. 개미를 누르면 계 시인의 한국어 시와 번역가 공민의 영어 번역본이 동시에 나온다. 현 가의 몰락 홈페이지 캡처

계 시인은 타인의 승인이나 권위에 기댄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시인이 됐다. 지난해 12월 공개한 웹사이트 형태의 첫 시집 ‘현 가의 몰락’을 통해서다. 그는 “평소에 웹진을 많이 읽는데 ‘오직 시만을 위한 인터넷 공간이 있다면 그게 바로 시집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밝혔다. 웹시집에서 한국어 시와 번역가 공민의 영어 번역시를 동시에 발표한 그는 “영미권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저와 번역가의 바람에 맞는 형식이었다”고 전했다.


“향기로운 헛것 보여주고 싶다”

유수연 시인. 본인 제공

출발점은 다를지라도 시인들은 모두 어딘가에 있을 독자를 만나려 시를 쓴다. 유 시인은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는 말을 많이 한다”며 “(그 상태가) 한강의 노을처럼, 작은 위로처럼 느껴지고, 그런 일을 계속하고 싶단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시집 속 시인의 말을 통해 “향기로운 헛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힌 고 시인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비일상이 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때론 일상과 무관해 보이는 사랑이나 용기는 그것이 곁에 있다고 믿음으로써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다.

이들에게 더욱 널리 읽히길 바라는 자신의 시 한 편을 물었다. 고 시인은 ‘연장전’, 변 시인은 등단작인 ‘언더독’과 ‘탑독’, 계 시인은 시집 제목과 동명의 시 ‘현 가의 몰락’을 꼽았다. ‘잘 버티고 있다/그거 하나쯤이야/사는 데 문제없으므로/나를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아본다'는 구절이 나오는 ‘믿음 조이기’를 고른 유 시인은 “나를 버리고 싶은 생각을 겨우 참고 있는 어떤 한국인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독자들에게) 위로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에요. 위로하는 법을 깨닫게 하고 싶다는 게 맞겠네요.”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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