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한의 일본 탐구 <47> ‘일학개미’ 기대 키우는 일본 증시] 닛케이평균, 34년 만의 3만6000엔 돌파…日 기업 수익력 살아나
일본 증시가 연초부터 달아오르고 있다. 닛케이평균주가는 1월 하순 3만6000엔을 돌파, 연초 대비 9% 이상 올랐다. 주가는 버블(거품) 경제기인 1989년에 세운 사상 최고치(3만8915엔·약 35만원)에 바짝 다가섰다. 일본 주식을 보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시각도 달라졌다. 외신에는 주가 전망을 밝게 보는 투자 보고서와 기사들이 연일 쏟아진다. 올 들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끝났다’는 주장이 확산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잃어버린 30년은 끝났다
시장 전문가들은 주가 상승 배경으로 △미·중 갈등 격화 △엔화 약세 △정부의 증시 부양책 △기업들의 주주 친화 정책 등을 꼽는다. 이런 국내외 요인들이 맞물려 기업들의 수익력(돈 버는 힘)이 강해졌고, ‘일본주(株)’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잃어버린 30년’은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장기 침체기를 지칭한다. 일본이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자랑하던 1980년대 후반 버블이 발생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를 계기로 미국 달러 가치는 급락한 반면, 엔화 가치가 급등했다. 일본 정부가 ‘엔고(엔화 강세)’를 저지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내리자, 기업 대출이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 국제 유가도 큰 폭으로 떨어져 일본 기업들의 이익은 급증했다. 일본 내에서 통화량이 급팽창하면서 많은 자금이 부동산 투자로 몰려 거품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90년대 접어들며 일본에서 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선 데다 중동전쟁 발발로 유가가 급등하자 상품 가격이 오르고, 기업들의 이익이 쪼그라들었다. 많은 사람이 부동산을 내다 팔며 가격이 폭락했고, 거품 경제가 붕괴했다. 실제로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88년 6.79%에서 1992년 0.85%에 이어 1993년 –0.52%로 떨어진 뒤 2000년대 들어 연평균 1% 선을 맴돈다.
올 들어 일본 경제가 살아나고 있다는 주장이 늘고 있다. 무샤리서치의 무샤 료지 대표는 “잃어버린 30년이 끝났다”고 단언한다. 그는 “미·중 대립으로 글로벌 경제 환경이 바뀌면서 지정학적으로 일본에 투자가 몰리는 구조”라며 “일본 경제 전망이 매우 밝다”고 주장한다. 장기간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에 빠졌던 일본에 순풍이 불어와 주가가 연내 4만엔대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했다.
3대 호재, 기업 수익력, 주가 부양책, 新NISA(일본개인저축계좌)
전문가들은 주가 상승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일본 기업들의 ‘수익력’ 부활이다. 3월 말 끝나는 2023 회계연도에 일본 상장 기업의 순이익은 3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전망이다. 일본 제조업을 대표하는 도요타자동차는 사상 최고 이익을 내고 있다. 엔저 순풍을 탄 자동차 산업의 호조에 힘입어 부품, 기기, 소재, 반도체 등도 이익이 급증하고 있다. 고부가가치를 만드는 바이오·제약 업종에서도 백신이나 인지증(치매) 치료 약으로 세계적 성과를 내는 일본 기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제조업이나 식품업의 수익력도 높아졌다. 식품, 소매 등 많은 분야에서 소비자의 만족도 향상과 가격 상승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 증가 덕분에 음식, 숙박, 교통 관련 업체의 실적도 개선됐다.
둘째, 일본 정부의 주가 부양 정책이 차츰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2023년 3월 상장사를 대상으로 경영 체질 전환을 촉구했다.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이하 기업들은 수익성을 높일 방안을 제시하고 실행하도록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상장사들은 과다 보유 주식의 매각, 인재 육성을 위한 임금 인상 및 투자 확대, 성장 전략 강화에 나섰다. PBR 1을 밑도는 회사는 주가(시장가치)가 순자산(장부상 가치)보다도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올 들어 ‘신NISA(일본개인저축계좌·NIppon Individual Saving account)’ 시행으로 개인 투자가의 자금이 증시로 유입되고 있는 것도 호재다. 개인의 비과세 보유 한도액이 1800만엔(약 1억6200만원)으로 확대된 덕분에 보유 자금을 주식 매입에 활용하기가 쉬워졌다. 이 계좌는 예·적금은 물론 주식, 채권, 펀드까지 투자할 수 있는 데다 수익에 비과세 혜택을 주기 때문에 ‘만능 통장’으로 불린다.
주가, 연내 사상 최고치 경신 예상
물론 글로벌 시장에 호재만 있는 건 아니다. 중국 경제는 부동산 버블 붕괴로 어려움이 예상되고, 오는 11월로 예정된 미국 대선과 전쟁에 휘말린 중동 정세도 시장 불안정을 키우는 요소다. 올해 세계경제가 크게 후퇴하지는 않겠지만, 투자가들이 리스크를 줄이는 쪽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제 흐름 속에 일본 증시가 올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울 수 있을지는 기업들의 ‘수익력’ 증대에 달렸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일본 기업들이 글로벌 수요 확대가 예상되는 전기자동차(EV), 반도체, 바이오 의약품 등의 분야에서 연구개발(R&D) 및 생산 체제를 더 강화할 수 있을까.
해외 투자가들은 2023년 이후 일본 주식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다. 수년간 이어진 엔화 약세 덕분에 달러나 유로화 등 외화 자금을 운용하는 해외 투자가 입장에서 일본 주식은 매우 싼 편이다. 런던 투자 기관의 한 펀드매니저는 “가격이 싼 데다 엔저 순풍도 불어 일본 주식이 바겐세일처럼 보인다”고 했다.
일본 주가 상승이 적어도 올 연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다수다. 마부치 마리코 일본금융경제연구소 대표는 “주가가 연내 최고 3만8000엔(약 34만2000원)까지 갈 것”으로 전망했다. 닛케이평균주가를 구성하는 종목의 주당순이익(EPS)이 지금보다 10% 증가해 2300엔(약 2만원)대에 이르고, 주가수익비율(PER)이 16배까지 상승할 걸로 예상한 결과다.
주가 5만~6만엔(약 45만~54만원) 시대를 예측하는 전문가도 있다. 투자 전문 회사인 카부치에의 후지이 히데코 대표는 “도쿄증권거래소의 상장사 경영 효율 개선 및 정부의 임금 인상 유도 정책에 힘입어 글로벌 투자가들 사이에 ‘일본주’ 매입 열기가 확산하는 중”이라며 “올해 주가가 4만엔을 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분석한다. 외국인 애널리스트 조지프 크래프는 “예금에서 투자로의 흐름을 타고 일본 개인들이 보유 자금의 1%만 주식 투자로 돌려도 그 자금이 약 11조엔(약 99조원)을 넘어 해외 투자금의 두 배에 달한다”며 “5년 안에 6만엔대에 올라설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전망했다.
투자 유망 종목은 세계 1위 가능 기업
투자 전문지 ‘머니 포스트’는 세계시장에서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큰 기업을 유망 종목으로 꼽았다. 도요타자동차, 일본전산, 유니클로 등 일본 대표 기업도 좋지만, 앞으로 세계시장에서 1위가 기대되는 기업이 투자처로 더 매력적이라는 분석이다. 예를 들면, 닛신식품, 리쿠르트, 소니, 닌텐도, 아식스 등이다. 닛신식품은 즉석 면 시장에서 세계 1위를 노린다. 매출 기준으로 중국이나 인도 최대 기업과 비슷하지만, 푸드테크놀로지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인재 파견 업체 리쿠르트는 세계에서 월평균 2억 명 이상이 이용 중이다. 소니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1위를 꿈꾼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 중심 기업으로 변신한 소니는 게임,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종이 회사 매출의 60% 선을 넘어섰다. 가정용 PC 게임에서 시가총액 세계 5위인 닌텐도도 주목받고 있다. 이 회사의 포켓몬스터(포켓몬)는 캐릭터 수익에서 헬로키티, 미키마우스를 제치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아식스는 러닝슈즈 매출에서 세계 1위를 눈앞에 두고 있다. 스포츠용품 전체로는 나이키가 아직 1위지만, 러닝슈즈 등의 호조로 매출 격차가 좁혀지는 추세다.
Copyright © 이코노미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