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서 춤추는 ‘로봇 종합극’ … “이방인과 더불어 살 미래 그려”

유승목 기자 2024. 2. 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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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권병준
오체투지 수행하듯 절 하기도
인간 공동체 확장가능성 질문
그룹 ‘삐삐롱스타킹’ 멤버 출신
소리와 공학 결합한 예술 탐구
“로봇은 작업인생 함께할 단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을 수상한 권병준 작가. 지난 13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자신의 작품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을 올려다보며 “의도한 대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오류가 나 고쳐야 하기도 한다. 어린아이처럼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고 했다. 곽성호 기자

“여기 있는 로봇 친구들은 남은 작업 인생을 함께할 단원들이거든요. 이 움직이는 낯선 존재들과 언젠가 밴드를 꾸려 함께 음악을 할 겁니다. 물론 지금도 합주를 하고 있지만요.”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깊숙한 곳에 마련된 전시장에 들어서면 오묘한 몸짓을 하는 로봇들을 마주하게 된다. 외나무다리 위에서 쨍한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함께 춤을 추는가 하면, 마치 티베트 라마승이 사막을 건너며 오체투지(五體投地) 수행을 하듯 묵묵하게 절을 하기도 한다. 전시장 한편에선 한 예술가가 무대감독을 맡아 모든 시퀀스를 조율하며 로봇들이 만들어내는 ‘종합극’을 이끌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올해의 작가상 2023’ 권병준(53)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전시된 권병준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로봇’. 유승목 기자

올해의 작가는 미학적·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예술가 4인을 선정해 신작 제작과 전시 기회를 주는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수상 제도다. 갈라-포라스 김, 이강승, 전소정 등 글로벌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쟁쟁한 작가들과 경쟁한 권병준은 “인간 공동체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질문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난 8일 최종 수상작가로 선정됐다. 그의 로봇들이 보여준 느릿한 몸짓에 동시대성이 담겨 있단 뜻이다. 13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순전히 나이가 많아 준 것”이라고 겸양하면서도 “미술관의 관행을 깨고 로봇을 풀어놓는 행위 자체가 자유를 찾아가는 선언적인 성격이 있다”며 통찰을 내놨다.

권병준의 로봇들은 낯섦 그 자체다. 미술관을 배회하며 전시 문법에 균열을 낸 점도 그렇지만, 인간에게 쓸모 있는 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태어난 로봇의 본령을 깨뜨리고 유희하는 모습 자체가 생경하다. 권병준은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는 로봇으로 가득 찰 텐데 이 전시장이 바로 그런 근미래를 경험하는 곳”이라며 “로봇은 우리에게 있어 가장 낯선 이방인이고, 이들이 넘쳐나는 때가 되면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며 인간과 공동체는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방인으로 로봇이 춤추는 세상을 만들어보게 된 계기는 2018년 예멘 난민들이 대거 한국을 찾았던 사건이다. “난민들에게 너무나 배타적인 모습을 보면서 한국 사회의 큰 벽을 느꼈다. ‘아,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가장 낯선 이방인인 로봇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보고 싶어 로봇을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이방인에 두고 늘 서로를 나누는 벽을 허무는 시도를 해왔던 삶의 궤적이 미술관을 배회하는 로봇을 시도하게 만든 동력이기도 하다. 권병준은 미술가로 올해의 작가상을 받았지만, 예술의 뿌리는 음악에 있다. 1990년대 공영방송 음악 프로그램 무대서 손가락으로 욕을 하고 침을 뱉어 아직도 회자되는 방송사고를 낸 문제적 밴드 삐삐롱스타킹, 세기말 한국 인디씬에서 주목받은 원더버드의 보컬 ‘고구마’가 바로 권병준이다. 이후 네덜란드 유학을 떠나 소리학을 배워 사운드 엔지니어로 활동한 그는 ‘소리와 공학을 결합한 예술’을 꾸준히 선보이며 공연뿐 아니라 전시 무대도 꾸준히 두드려 왔다.

권병준은 “음악으로 심은 씨앗을 계속 확장해 나가고 싶었다”면서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이번 전시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경계를 지우고 벽을 넘어가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면서 “음악을 하며 직접 만들던 악기가 무대 장치가 되고, 또 퍼포먼스로 확장하는 과정을 미술의 영역에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여 준 것 같다”고 했다.

권병준은 로봇과 함께 몸짓에 대한 탐구를 지속할 계획이다. 원더버드 1집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 첫 마디에 나오는 ‘싸구려 인조인간의 노랫말’처럼, 언젠가는 로봇들과 그룹사운드를 꾸려 문제적 밴드를 다시 한번 만들어 보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 1990년대 세기말 그의 노래를 들었던 알 만한 사람들은 ‘오묘한 진리의 숲’ 등 전시장 곳곳에 놓인 그의 작품명이 그의 노랫말에서 따온 것임을 알고 일찌감치 그의 꿈을 짐작하고 있다. 권병준은 “긴 시간 쌓아온 노력의 힘을 믿는다”면서 “로봇은 저만의 악기이고 음악을 확장하고 움직임을 탐구하는 과정을 하나의 연주로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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