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중소기업, 총선 뒤 대출만기 82조…고금리 빚에 줄도산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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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2일 오후 대구 서구 비산동 염색산업단지는 평일인데도 철문을 걸어 닫은 공장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불 꺼진 공장 안쪽 적재용 깔판(팰릿)에 100개씩 쌓아둔 46미터(50야드)짜리 합성섬유(폴리에스테르) 원단 뭉치가 보였다. 납품되지 못한 재고 물량인 듯했다.
대구 중심가에서 북서쪽으로 5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이 산업단지엔 직물업체의 수출용 원단을 염색하는 염색업체 100여곳이 있다. 염직회사를 운영하는 ㅇ 대표는 “지난해 상반기까지 80~90%였던 공장 가동률이 연말부터 60%로 뚝 떨어져 금요일엔 인건비만 지급하고 쉬는 ‘주 4일’ 공장이 적지 않다”며 “원자재 가격이 뛴 데다 코로나19 기간에 빌려 써서 불어난 정책대출금의 이자가 작년부터는 과거의 갑절인 연 6~7%대에 달해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했다.

통상 연초는 미국·중동 등 외국에서 주문이 쏟아지는 섬유업계의 최대 성수기다. 지금 사정은 딴판이다. 대구경북섬유직물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을 맡은 이석기 호신섬유 대표는 “‘매기’(매수세)가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우크라이나·중동 전쟁 등으로 세계 섬유시장 ‘큰손’인 튀르키예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제로금리와 보조금을 앞세운 일본과 중국 기업 사이에 끼여 코로나 때 빚으로 버틴 회사들이 이제 고금리 부담으로 줄줄이 무너질 판”이라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마이너스통장 대출 이자 780만원(연리 9%)의 상환을 촉구하는 은행이 보낸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10년여 만에 찾아온 고금리 충격이 중소기업을 때리고 있다. 코로나 기간 급증한 빚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진 ‘부채 스노볼’ 현상 때문이다. 특히 금융권의 올해 중소기업 대출 만기 도래 시기가 4월 이후에 몰린 터라, 총선 직후 무더기 대출 회수 등으로 인한 기업 줄도산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전체 금융회사들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은 지난해 9월 말 현재 총 864조4천억원(개인사업자 대출 미포함)으로, 코로나 전인 2019년 말 대비 318조8천억원(58.4%) 증가했다. 이 기간 대기업과 개인사업자 대출이 각각 93조5천억원(51%), 234조7천억원(51%) 늘어난 것에 견줘 증가폭이 눈에 띄게 크다.
불어난 대출 청구서는 전례 없이 비싸다. 은행권의 중소기업 대출 잔액 평균 금리는 지난해 말 기준 연 5.36%로, 2013년 3월(5.39%) 이후 10년9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십수년간 지속된 ‘치프 머니’(초저금리) 종말이 우리 경제의 허리인 중소기업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는 셈이다.

한겨레가 국민·신한·하나·우리·농협은행 등 5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현황을 조사한 결과, 올해 대출 만기 도래액 204조원 중 40%(82조원)의 상환 시기가 총선 직후인 4~7월에 집중돼 있다. 통상 채권은행은 대출 기업이 전년도 경영 실적 결산을 마치면 4~7월에 자체 신용평가를 거쳐 대출 회수, 금리 인상, 만기 연장 여부 등을 정한다. 대형 은행 출신의 한 금융사 대표는 “그동안 ‘표 떨어질 수 있다’는 정치권 압력에 대출 만기를 연장해온 은행들이 선거 뒤에는 더는 눈치 보지 않고 기업에 본격적으로 칼을 들이댈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외 경기 부진 속 고금리의 직격탄을 맞은 중소기업들이 도미노처럼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법원통계월보’를 보면 연 5%대 고금리가 본격화한 지난해 국내 법인 파산신청 건수는 전년 대비 65% 늘어난 1657건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한 바 있다.
치프머니(cheap money)시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초저금리가 장기간 지속되며 가계·기업이 싼값으로 손쉽게 돈을 빌려 썼던 2022년 이전 10여년의 저금리 시기를 이르는 말.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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