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마음무덤지에서

안지숙 소설가 2024. 2. 1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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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숙 소설가

전남 해남 연동리에 있는 ‘백련재 문학의집’에 잠시 거주하고 있다.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과 해남윤씨 고택 녹우당을 돌아 비자나무 숲길을 걷다 오는 게 하루 일과 중 하나다. 오늘은 비자나무 숲길을 버리고 논과 밭으로 이어지는 평지 길로 걸음을 놓았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생각할 게 있어서다.

느린 걸음으로 녹우당길을 따라 걸었다. 문 닫은 경로당과 대문이랄 게 없는 집들, 주말 별장으로 지은 듯한 몇몇 집을 지나며 걸었다. 녹우당길을 벗어나니 텃밭의 푸성귀가 말라가는 빈집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때마다 와서 농사를 짓거나 농작물을 관리할 때 이용하는 집은 죽으라고 짖어대는 개가 묶여 있었고, 아예 폐가로 비운 집은 마당에 잡초가 무성했다. 손을 좀 보면 살만할지 어떨지 빈집에 자꾸 눈길이 갔다. 산 좋고 들 좋고 공기는 당연히 좋은 이곳에서 빈집을 얻어 살아볼까. 내심 마음이 동했으나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윤선도 유적지가 있는 마을이라는 데 끌려 레지던시 중이긴 하나, 몇 달 머무는 거랑 거처를 옮겨 주민으로 사는 건 차원이 달랐다.

마을을 벗어나 너른 들을 걷다가 돌아오는 길, 해송림에 둘러싸인 백련지 연못에서 걸음이 멈췄다. 평소 산책을 비자나무숲 방향으로 하는 터라 이쪽으로는 올 일이 없었다. 먹거리를 사러 해남읍에 나갔다가 오는 길에도 지나치기만 했는데, 오늘따라 가까이서 연못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2년 계약 만기를 앞두고 이사할 것이냐 눌러살 것이냐, 마음이 갈팡질팡 복잡해서였을 것이다.

나무다리를 밟고 연못 한가운데 돋워놓은 흙섬으로 들어섰다. 세상에.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저 물빛 흐린 연못이려니 했는데, 막상 들어서고 보니 다른 세계로 슬라이딩해 들어온 느낌이다. 정자에 올라앉아 차분히 둘러보았다. 볼수록 참한 연못이었다. 모양새가 독특한 것은 자연스럽게 생긴 연못이 아니라 마음 심(心)자 형태로 만든 인공연못이어서일 거다.

백련지를 만든 윤효정은 이 연못을 ‘마음무덤지’라 불렀다. 왜 마음무덤지라 불렀는지는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녹우당을 찾은 사람들이 옷매무시를 살피며 숨을 돌릴 만한 곳에 연못을 짓고 연꽃을 심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옛 어르신의 속마음을 알 수는 없지만, 녹우당 일원을 선계로, 연못과 해송림 바깥을 속계로 인식한 데서 마음무덤지라 부른 연유를 짚을 수는 있었다. 성균관 생원시에 합격하지만 벼슬에 오르지 않고 농사와 자식교육에 힘쓴 생애를 보건대, 윤효정은 연꽃을 연못에 심고 마음무덤지라 명명하면서 속세에 대한 욕망과 미련을 묻어버리고자 했을 것이다. 연꽃은 아무리 더러운 곳에 있어도 때 묻지 않은 채 깨끗하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청정과 청렴의 상징이 아닌가.

선계와 속계의 경계라는 백련지에서 연못을 만든 의미를 더듬으며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어라, 마음을 어지럽히던 문제가 어디로 갔는지 잡히지 않았다. 전셋값이 내렸으니 같은 가격으로 더 너른 방을 찾아보자, 마음을 들쑤시던 욕심이 내 마음의 무덤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얼마 전 부산작가상을 탔을 때 기쁨과는 별도로 부모님이 살아계시던 수년 전에만 탔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막연히 서운했던 마음도 묻기로 했다. 마음이 옹졸해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묻기로 했다. 사사건건 논리를 들이대며 따지는 마음을, 의심과 탐욕과 불안을, 자신을 속이는 같잖은 동정심을,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묻었다. 묻을 수 있는 건 다 묻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하던지.


‘백련재 문학의집’으로 돌아오는 걸음 또한 참으로 가벼웠는데…. 창호지 문을 미는 어둠이 점점 묵직해지면서 묻어놓은 마음이 밤의 방종처럼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스스로 마음무덤지를 만들려고 가부좌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직방 앱을 켜고 찜해 놓은 11평 투룸의 이미지를 요리조리 살피고 있다. 마지막 딱 한 번의 고민까지 묻어버릴 마음무덤지를 척척 만들면 그게 어디 속계 인간인가. 그냥 선계로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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