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윤의어느날] 그날의 줄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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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상점에서 파는 저금통은 그야말로 '돼지저금통'이었다.
뻣뻣한 고무로 된 다홍색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으려면 등 쪽 투입구를 칼로 잘라내야 했다.
동전은 저금통 안에서 헐거운 소리를 내며 굴러다닐 뿐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언니가 내 손에서 저금통을 빼 든 건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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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내 손에서 저금통을 빼 든 건 그때였다. 언제 집에 왔는지 어디서부터 보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니는 동전 투입구 옆면을 힘껏 눌러 틈을 벌린 뒤 저금통을 좌우로 느리게 흔들어 머리핀을 빼냈다. 아빠에게 머리핀을 들키는 것과 언니의 고자질 중 어느 쪽이 내게 더 치명적일까. 나는 또 다른 공포에 휩싸였다. 언니는 바닥에 내려 두었던 줄넘기를 챙겨 들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내게 뭔가를 따져 묻지도, 혼을 내지도 않았다. 대문 밖에서 줄넘기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내리치는 규칙적인 소리가, 휘잉 휭 이단뛰기를 시도하는 소리가, 줄을 밟은 뒤 내는 짧은 탄식이 번갈아 들렸다. 활기차고 건강한 소리가 계속될수록 저금통을 흔들던 나의 조잡하고 음침한 소리가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는 저금통을 전축 위로 돌려놓았다.
생색도 조언도 고자질도 없었지만 나는 다시는 저금통에 손대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을 시간을 주는 것. 정말 중요한 것은 스스로 멈출 기회를 주는 것 아닐까. (물론 언니는 줄넘기를 빨리 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줄넘기 소리를 종종 떠올린다. 그러면 틀림없이, 정직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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