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평범한 시민들이 세상을 바꾼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시민 덕희>는 보이스피싱을 당한 덕희가 주인공이다. 담당 형사는 보이스피싱 콜센터 주소 없이는 경찰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늘어놓으면서 덕희의 전화를 피하기에 바쁘다. 결국 덕희는 자신처럼 평범한 여성 셋과 함께 중국으로 범죄 조직의 총책을 직접 잡으러 나선다. 영화는 평범한 시민들의 힘으로 세상을 조금은 나아지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관람 내내 TV 오락프로그램에서 “한 사람의 카리스마, 한 사람의 현란한 말솜씨가 아닌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인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어느 개그맨의 말이 생각난 것은 작금의 정치현실 때문이다.
4월10일 치러지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두 달도 남겨 놓지 않은 상황에서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모두 자기들에게 유리한 ‘텃밭’ 선거구를 뺏기지 않으려 하다 보니 선거구 획정조차 못하고 있다. 이번뿐만 아니라 21대 때 40일, 20대 때 42일, 19대 때 44일, 18대 때 47일, 17대 때 37일을 앞두고 결정되었다. 이처럼 국회의원 지역구를 선거일 1년 전까지 획정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을 국회 스스로가 지키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연봉을 1.7% 올린 1억5700만원으로 정하는 셀프 인상에는 부지런하다. 비례대표 선출 방식 역시 국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한 국회 내 건설적 논의가 아니라, 지난 5일 현행 준연동형 비례제 유지 결정으로 사실상 위성정당 창당을 공식화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첨예한 선거구 획정과 선거제도, 그리고 이해상충에 해당하는 의원 세비 인상이나 징계 등을 평범한 시민들에게 맡기는 게 오히려 영화에서처럼 문제 해결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시민들이 나설 수 있을까? 바로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 의회배심 방식이다.
22대 국회에서는 다음 총선 최소 1년 전에 선거구 획정을 포함한 선거제를 확정할 수 있도록 선거제도개혁시민의회를 운용할 것을 제안한다.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에서 선거제도를 바꾸기 위해 1년 가까이 운용한 시민의회를 참고할 만하다. 추첨을 통해 선거구별 남녀 한 명씩으로 구성하여 학습,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숙의를 통한 권고 과정으로 진행되었으며 최종 결정은 주민투표로 이루어졌다. 우리의 경우 시민의회에서 결정한 선거구 획정과 선거제를 본회의에서 최종 통과 여부를 결정하게 한다면 국회 입법권 역시 침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함께 작년 김남국 의원 징계 처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원에게 동료 의원의 징계를 맡기는 구조에서 탈피하여 의회배심 역시 요청된다. 국민참여재판제도의 배심처럼 추첨 방식으로 구성하되 그 규모를 좀 더 확대한 의회배심에 의원 징계 및 세비 인상 등을 맡기고 결정된 내용을 국회 본회의로 바로 회부하게끔 하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동료 시민’을 언급한다. 민주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당의 정신으로 하고 있다. 여야가 필요할 때 끄집어내 쓰는 ‘시민’이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경청과 토론, 숙의를 통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하고 그 과정에서 정해진 다수 의견에 승복하고 소수 의견도 존중함으로써 ‘깨어 있는 동료 시민’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시민의회, 의회배심부터 적극적으로 공약으로 내세울 것을 요청한다.
더 나아가 아일랜드헌법개정시민의회처럼 헌법 개정에도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원제 개헌을 통해 기존의 선거로 구성되는 정치 엘리트들의 국회와 추첨으로 선출되는 평범한 시민들의 시민의회를 통해 ‘민주주의’가 보다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지문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 연구교수·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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