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만의 단체협약…삶도 투쟁도 윤슬 같은 반짝거림이었다

한겨레 2024. 2. 13.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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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비정규 노동수기 공모전 우수상
2022년 6월10일 단체교섭 해태에 투쟁하는 전국조합원 2차 결의대회 현수막 찢기 퍼포먼스. 필자 제공

가난한 노동자와 결혼한 뒤 아이가 태어나니 살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있는 직업을 찾기 어려웠다. 다행히 집 근처 서울 구로공단 한 전자공장에 다닐 수 있었지만, 세살 아이를 탁아방에 맡겼다가 아이를 데리고 퇴근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저녁엔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둘째를 가지면서 그마저도 어렵게 돼 살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한학기 동안 잘 적응하는 것을 보고, 여름방학이 되자 기저귀와 우유를 뗀 둘째아이와 함께 시골 시댁에 맡기고 올라왔다. 학습지 회사 대교에서 일하게 돼 8박9일 신입교사 연수를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다. 연수를 마치고 한 지점에서 ‘눈높이 교사’ 일을 시작했고, 2학기가 되기 전 큰아이만 시댁에서 데리고 올라와 일과 살림을 병행했다.

당시는 학교돌봄도 없던 시절이라 큰아이 홀로 집에 두고 일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눈높이 교사 생활은 저녁이 없는 삶이었다. 정작 내 아이는 챙기지 못해 혼자 방치해 둔 채, 집집이 회원 이름을 부르며 밤 9시, 10시가 넘도록 골목을 돌고 돌았다.

그렇게 대교 눈높이 교사로 27년째 일하고 있다. 비록 학교 선생님은 아니어도 가르치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회원과 학부모를 만났고, 10년 20년 넘도록 꾸준히 일하다 보니 신뢰가 쌓여 새 회원을 소개받는 경우도 많았다. 적성에도 맞는 일이었고 열심히 해서 눈높이 교사로는 최고 수수료까지도 받았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에 의미를 두는 회사의 철학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목표치에 따른 실적 압박을 받아야 했고, 퇴회(학습을 그만두는 회원)수치를 신규회원으로 메꾸지 못하면 교사 수수료(급여)에서 차감돼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느끼기 어려웠다. 또 회사의 정규직원이 아니라 해마다 재계약해야 하는, 퇴직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회사가 말하는 개인사업자일 뿐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현장에서 고참 중 최고참이, 관리자에게는 ‘부당하면 바른 소리 하는 밉보인 교사’가 돼 있었다.

교섭 기간 중 ‘단체협약 체결촉구’ 대교본사 출근 선전전. 필자 제공

노동조합 가입과 동시에 간부로

2000년 대교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된 이후 노조 간부 해고 등에 맞서 300일 천막농성까지 하며 치열하게 싸워왔지만, 내가 노조에 가입한 2013년에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회사를 떠나고 지부장과 몇몇만이 산별 노동조합을 정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오랜 투쟁으로 조합원 수가 많이 줄었고, 일할 사람이 없어 신입 조합원이 바로 간부가 됐다. 노조에서의 경험이나 간부 교육도 없이 바로 실전에 투입된 셈이었다.

노동조합의 투쟁은 현장 부정영업과의 한판 싸움이었다. 팀을 묶어 할당되는 목표수치를 채우도록 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만두는 회원을 퇴회처리 않고 자기 돈으로 회비를 회사에 넣도록 하는 등의 부정영업에 견디다 못한 교사들이 조합에 연락해 왔다. 이후 교섭에서 회사는, 조합의 계속된 정도경영 요청 끝에 본사 차원의 허위회원 처리(클린징)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부정영업의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던 시작은 현장 교사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은 노조가 있어서였다.

당시는 몸에 혹이 크게 생겨 개복수술을 했는데, 몸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현장 일과를 챙기며 노조 간부 대열에 합류해 일했다. 왕따나 괴롭힘이 있다고 교사들이 뭉쳐 노조에 연락하면, 현장으로 달려가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었다. 그렇게 하면서 조합원이 점점 늘었고 ‘교사들도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구나’라는 희망이 생겼고 ‘조직활동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뿌듯해했다. 주중 5일은 현장 회원들 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고충을 알려오는 교사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노동조합 일을 했다. 얼마 지나서는 조합 일이 늘어 금요일까지 노동조합 일을 하게 됐다.

‘학습지 교사도 노동자’ 대법 판결까지

2018년 6월15일 ‘학습지 교사는 노동자다’는 대법원 판결이 났다. 힘을 얻게 된 대교지부도 회사와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다시 나섰다. 하지만, 회사는 재능교육지부의 일일 뿐 대교지부도 대법원 판단을 받아야 단체교섭을 할 수 있다는 억지를 부렸다. 결국 그해 8월 지방노동위를 시작으로 중앙노동위, 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 순서로 3년여 동안 이어질 법률투쟁을 시작했다. 코로나 시기였지만 본사 앞 선전전과 대법원 앞 1인 릴레이 시위 끝에 2021년 10월14일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물론 회사는, 학습지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며 현장에서 지휘·감독이 없었다고 부정했다. 내가 일하는 곳의 지점장도 법원에 그런 내용의 사실확인서를 제출했다는 걸 판결문을 받아보고서야 알게 됐다. 회사가 이렇게까지 교사를 업신여기나 싶어 분노했다.

코로나로 현장 초토화…끝까지 버텨내

2020년 초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자 현장은 그야말로 초토화되어 버렸다. 방문교사가 회원을 만날 수 없다니…. 일부 학부모를 설득해서 화상수업을 하고, 이마저도 안 되면 교재를 우편함에 넣고 수거해서 채점한 뒤 소독해 다시 넣어주는 일을 반복하며 버텨야 했다. 회사는 그 와중에도 화상수업용 태블릿을 강매해 교사들에게 비용을 전가했고, 교사들은 이중삼중으로 힘들었다.

코로나로 수입은 반토막났지만, 회사로부터 마스크 하나 제대로 지원받을 수 없었다. 대면으로 만나던 회원에게서 코로나에 감염돼 격리돼도 나몰라라 했다. 분노한 우리는 회사 앞으로 달려가 마스크를 지급하라, 상생하도록 회사가 나서라고 외치고 또 외쳤다. 조합원 중에는 모두가 조심해야 하는 시기 노조가 욕을 먹을 수 있다며 코로나 시기에 본사 앞 선전전에 반대하는 이도 있었다.

투쟁 결과 동행기금 10만원과 200만원 한도 대출을 받아낸 게 전부였다. 개인 손소독제가 없던 교사들은 사무실에 비치된 소독제를 덜어 가지고 다니며 사용했다. 회사도 엄청난 영업적자를 견뎌야 했다지만 상생은 뒷전이었다.

회사 앞 선전전을 하던 2020년 5월15일 스승의날, 회사는 교사마다 38~57% 수준이던 급여율을 방문교사는 50%, 센터교사의 수수료를 40%로 통합, 동결하는 신제도를 도입했다. 말로는 기존 제도와 선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신제도를 선택하라는 압박이 이어졌다. 여기에 순증 수당과 건강검진, 장례물품 지원 등 그나마 있던 복지제도는 모두 폐지됐다. 없애버렸다. 회사는 신제도 수수료율이 업계 최고여서 경쟁업체에서 교사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대교의 악제도, 재계약심사제도

학습지 회사 중에서도 정도경영을 가장 크게 부르짖던 대교는 코로나 이전에도, 모두 어려운 터널을 지나온 이후에도 여전히 초지일관 바뀌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재계약심사 때 교사는 △누적총원 600 이상 △누적퇴회율 6.5% 미만 △순증 0 이상 △고객만족도 50% 이상 4개 조건 중 2개 조건을 충족해야 재계약해주고, 센터장은 △순증 0 이상, 퇴회율 6.2%미만 중 한가지는 충족해야 재계약해준다는 점이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시장상황 등으로 회원이 늘지 않는데, 그에 따른 책임을 계약직들에 묻고 고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본사 앞 선전전에서도, 단체교섭이 열리던 중의 세차례 결의대회에서도 가장 크게 외쳤던 것은 재계약심사제도 폐지였다. 하지만 교사는 기준 완화, 센터장은 기준 개선 정도로 그쳤다. 단체교섭에서조차도 끝내 폐지하지 못한 부끄러운 제도 재계약심사제도이다. 정녕 회원 수 감소가 교사와 센터장의 책임이란 말인가? 대교는 이제라도 재계약심사제도를 폐지하고 서로 상생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2023년 9월22일 전국학습지산업노동조합 대교지부와 ㈜대교는 사상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노조 출범 23년 만의 일이었다.필자 제공

23년 만의 단체협약 체결

2000년 노동조합 설립 후 23년 만인 2023년 9월22일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2년여 동안 교섭간사로 교섭에 참여하며 회의록 정리와 녹취록 정리 등 일을 했던 세월들이 떠올랐다. 본사 앞 선전전과 결의대회 때 집회 물품을 실어나르느라 바빴고, 경찰서 정보과 담당 형사와 소음데시벨로 날 선 승강이를 벌였으며, 아들뻘 되는 형사에게서 “언니”라는 성희롱 발언을 듣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다 갑상샘암 수술을 받고 면역력이 떨어져 코로나에 감염되기도 했지만, 회원 관리와 교섭간사 일을 계속했다.

교섭위원들은 일과 시간 회원들 수업을 한 뒤 귀가해서는 밤늦게까지 교섭단 회의와 상황실 회의, 집행부 회의 등을 이어나갔다. 연맹 법률원 주최 특수고용직 교섭학교에 참가했고, 먼저 단체협약을 체결한 재능교육지부 등 특수고용직 노동조합의 경험과 사례를 공부하고 생생한 도움도 받았지만, 실전은 대교지부 우리의 몫이었다. 교섭단 9명은 여러 정체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36차 교섭 끝에 잠정 합의안을 도출, 조합원 총투표를 거쳐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대교지부는 노동조합 활동을 보장받게 됐다. 노조 사무실을 쟁취했으며, 근로시간면제제도를 적용해 조합원 교육과 홍보활동을 할 수 있게 됐다. 노사 소통창구, 정규직 전환과 공개채용, 신제도 전환 강요하지 않기, 입회 취소 기능개선, 교재 및 학습시스템 개선, 소득세 원천징수 환급처리, 제품 및 마케팅자료 지원, 사업장 내 성폭력·성희롱·직장내 괴롭힘 금지에 따른 예방조치 및 사건 조사와 피해자 보호조치, 구제도 교사 건강검진 부활, 신제도 교사 장의물품 지급, 선생님 재계약심사제도 기준 완화, 센터장 재계약기준 개선, 조합원 휴식을 위한 투명한 하계휴양소 운영 등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건강검진 상해보험 가입, 감염병 지원, 경조금 지원, 동절기 휴가와 휴가비, 장기근속 포상, 자녀회비 지원 등은 회사가 4년 연속 경영적자를 이유로 수용불가를 고수해 단체협약서에 넣지 못했다. 교착상태에 있던 재계약심사제도 폐지와 임금협약에서 양보한 수수료협약도 끝내 쟁취하지 못했다.

나는 체결식 직전 지부장과 지금의 첫발이 역사에 남을 한 걸음임을 강조하며 마음에 새기듯 꾹꾹 눌러 노동조합의 입장문을 썼다.

그 이후 번아웃된 나와의 투쟁

매회차 교섭 녹취를 노조 사무실에서 돌려 듣기를 반복한 끝에 녹취록을 정리해 교섭단 회의 전에 올리는 일이 정말 지치고 힘들었다. 대표 교섭위원 및 교섭위원들과 늘 함께였지만 교섭 간사로서 해야 하는 이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단체협약 체결 이후 공허함이 몰려왔고 몸 전체에 염증이 엄습해 죽을 것만 같았다. 노동조합에서 안식년을 가지고 싶었다.

힘들기로야 지부장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교섭이 끝나자마자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회원 관리(수업)를 하러 가는 교섭위원이 더 힘들었을 것이고, 지방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왔다가 내려가야 하는 교섭위원이 더 힘들었을 텐데, 나는 내가 더 힘들었다는 생각만 했던 모양이다. 이제 와 많이 미안하다.

나는 병원과 한의원과 황톳길에서 한달 동안 안식월을 보냈고, 다시 복귀해 회사와 노사 소통의 자리에서 역시 간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삶은 언제나 투쟁의 연속이고 눈물 나는 윤슬 같은 반짝거림이다.

김덕희 학습지 교사

※이 글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가 지난해 주최한 ‘13회 비정규 노동 수기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한겨레는 해마다 수상작 일부를 게재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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