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한국판 우생학

오창민 기자 2024. 2. 13.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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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영그룹에 이어 사모투자펀드 운용사인 IMM도 억대 출산장려금을 직원들에게 주기로 했다. 앞서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심각한 저출생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21년 이후 태어난 직원 자녀 70명 모두에게 현금 1억원을 지원하는 출산장려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연년생 자녀를 출산한 직원, 쌍둥이를 출산한 직원에게는 2억원씩 지급했다.

기업의 출산장려금은 여러모로 반가운 일이다. 한국 사회 최고 난제인 저출생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 회사 발전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금호석유화학과 HD현대, 현대자동차 등도 출산장려금을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는 이들 기업에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13일 “기업의 자발적인 출산지원 활성화를 위해 세제 혜택 등 다양한 지원방안을 즉각 강구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취업난과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막대한 사교육비에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에게 대기업의 출산장려금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언제부턴가 다자녀는 우리 사회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됐다. 서울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지난해 출산율 1위가 강남구다. 국가의 출생률 제고 정책도 은연중에 부유층에 맞춰져 있다는 느낌이다. 자녀에게 증여세 공제 한도인 1억5000만원의 결혼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전문직이나 공무원, 공기업 종사자, 대기업 직원들이 아니면 법으로 정해진 출산 휴가나 육아 휴직을 쓰기도 쉽지 않다.

19세기 영국에서 등장한 우생학은 열악한 유전자를 가진 인구의 재생산을 막고 적격자의 출산을 장려해 인류의 질적 향상을 꾀한 비윤리적 사이비 과학이다. 과거의 우생학이 국민의 결혼과 출산에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폭력적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21세기 한국판 우생학은 외견상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에 맡겨져 있다. 그러나 경제적인 이유로 출산을 할 수 없다면 강제 불임과 사실상 차이가 없다. 출산과 양육은 생명체의 본능이자 자연의 섭리다. 가난해도 사랑하고 싶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생명에는 계급이 없다. 출산과 출생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이 지난 2월 5일 서울 중구 부영빌딩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다둥이 가족에게 출산장려금을 전달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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