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나라의 주인이 공론장 주도하는 그날을 기대하며

이창곤 기자 2024. 2. 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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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_시민(유권자)

‘민’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동력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 천명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자 권력인 ‘민’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치행위자이자 정책행위자로 우뚝 선다면, 시민의 자조적 결사체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면, 마을과 동네에서 민이 주민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시민권’을 자각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나선다면….

2018년 3월4일 오전 서울시청 한화센터에서 열린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국민헌법 숙의형 시민 토론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기본권 확대, 지방분권, 직접민주주의, 국회와 대통령의 권한조정 등 개헌의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대한민국 헌법 제1조 ①, ②)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주인은 ‘민(民)’이라는 뜻이다. 주인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민은 민주공화국의 참 주인인가?

진부하더라도 가끔 본질적 물음이 필요한데, 지금이 그럴 때 아닌가 싶다. 세계 여러 나라가 그렇듯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 국가다. 민이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하고 그들에게 결정권, 즉 통치권을 위임하는 정치형태다. 이런 대의민주주의는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최선의 정치체제로 여겨지지만, 실상 결함투성이다.

이 정치체제에서 정치인은 자신을 뽑아준 유권자의 의견을 반영해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정치에서 유권자는 선거 때만 반짝 주인일 뿐 국가의 크고 작은 일상적 정책결정 과정에서는 배제된 구경꾼에 가깝다.

이런 결함은 중요 정책을 민이 직접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확대 담론을 낳는다. 풀뿌리인 마을을 단위로 정치공동체를 세워 직접민주주의를 대의제와 대등할 정도로 전개하자는 ‘마을공화국’은 그런 주장 중 하나다.

하지만 매사 민이 직접 정책을 결정할 수 없고, 국가의 미래에 관한 정책을 전문성 없는 민이 결정하게 하는 것은 문제라는 반론이 있다. 실제 민이 직접 결정하는 정치가 더 바람직한 결정을 낳으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중우정치’나 ‘포퓰리즘’을 낳을 위험이 다분하다는 시각 또한 만만찮다. 직접민주주의의 역설이자 딜레마다. 소수의 일반 시민들이 일정한 주제를 깊이 있게 토론하고 고민해 합의를 시도하는 숙의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 있다. 실제 문재인 정부에서 공론화위원회란 이름으로 그런 시도가 몇차례 있었지만, 제도적 틀로 안착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대의민주주의에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노동시장 등 사회변동으로 민의 상황과 욕구는 확연히 달라졌지만, 정치는 이를 응답하지 못하는 형국이 지속하고 있다. 제인 맨스브리지 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대의민주주의 국가가 처한 이런 상황을 “18세기 탄생한 민주주의 제도로는 21세기 오늘날의 변화된 사회현실에 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묘파한 바 있다. 더욱이 정치양극화로 깊어진 적대가 증오의 정치를 낳는 게 우리네 정치 상황이다. 김영호 경북대 명예교수의 표현은 우리 정치의 현실을 체감 있게 비추어 준다.

“우리는 대의제와 구경꾼 민주주의 관객들 혹은 팬덤들이 비정상적인 87년 체제의 연장 선상에서 그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던 촛불혁명이 시들어가는 미로(迷路)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근년 들어 대의민주주의의 기능부전이 심화하면서 대의민주주의와 대의기관에 대한 민의 신뢰는 더욱 낮아진 듯하다. 민의 대표를 뽑는 총선이 두달여 앞으로 다가왔지만 민심은 냉랭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서두에 다소 장황하게 ‘대의민주주의 위기’를 새삼 화두로 끄집어낸 이유는, 지난 2022년 6월 말부터 30여차례 걸쳐 펼쳐온 이 연재칼럼에서 살핀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여러 정책결정자 및 행위자들의 행태가 근본적으로 한국 ‘대의민주주의 정치’의 현주소와 동전의 양면이란 생각에서다. 아니 그 뿌리이자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선출됐지만 민주주의를 외려 퇴행시키는 제왕적 대통령, 그의 ‘여의도 출장소’격인 여당, 정치·사회개혁을 위한 문제 해결보다 적대적 공생을 통한 정치적 주판알 튀기기에 열중하는 국회의원, 예산이란 돈줄을 쥐고 민의 뜻을 합법적으로 농락하는 경제관료 등….

대한민국 정책결정자들의 행태와 일그러진 대한민국 정책생태계는 본질에서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취약함 혹은 실패의 적나라한 발현이자 영락없는 증거”다.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취약함과 실패’는 “민으로부터 공동체 전체의 존립과 공동선을 실현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받은” 정치와 그 행위자들이 오직 “이익과 갈등, 승리와 패배”만 강조하고 응당 추구해야 할 “공동선과 연대의 정신”은 뒷전으로 미는 ‘선사후공’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결정적 폐해는 “기후위기와 불평등 등 다중위기에 처해있음에도 그 공동해법을 찾는데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다”(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점이다. 이런 실패에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현 정부가 그렇게 외치는 ‘약자’, 즉 힘없고 빽 없고 돈 없는 취약계층이다. 어쩌면 구경꾼 민주주의가 이 나라 취약한 사회안전망의 핵심 원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최고의 ‘약자복지’ 방책은 질 높은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전후 유일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함께 이뤄낸 세계 10위권 경제강국, 성공한 나라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자살률, 산업재해율은 최고이고 출산율은 최저인 ‘인구위기의 불안사회’이기도 하다.

이 극단적 명암의 바탕에는 한국 대의민주주의 취약성 혹은 실패, 그에 따른 정책생태계의 오작동이 있다. 이들 실패와 오작동은 곧 복지한국의 위기이자 우리 공동체 구성원 삶과 미래의 위기다.

돌이켜보니 칼럼의 시작부터 끝까지 비관적 얘기만 늘어놓은 듯하다. 1년8개월 간 지속한 이 칼럼을 마무리하는 지금 솔직히 명쾌한 해법과 대안 제시는 능력 밖의 일이다. 다만 그런 속에서도 한가닥 희망의 근거를 애써 찾아본다.

그것은 결국 ‘민’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와 체험, 열정이 응축된 역사적 개념인 ‘민’은 이미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이념이자 가치다. ‘민’은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동력이다.

기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이나마 곧추세운 결정적 주체는 민이었다.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 촛불항쟁 등을 거쳐온 한국 민주화운동의 결정적 순간, 민은 때론 국민의 이름으로, 때론 시민의 이름으로 이 나라 주인임을 증명했다. 최근에는 ‘촛불시민’으로 호명된 민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의 찬연한 행위자였다.

하지만 정작 자기 삶의 질과 직결되는 일상적 정책 결정 과정에서 민은 정책생태계와 정치과정의 배제된 행위자 혹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직·간접 행위자를 톺아본 이 연재칼럼의 마지막에 시민을 언급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공화국의 주인으로서 민주주의의 극심한 퇴행과 위기의 순간 떨쳐 일어난 촛불시민은 이제 자신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정책결정 과정에서도 더는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

‘민’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동력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서 천명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자 권력인 ‘민’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정치행위자이자 정책행위자로 우뚝 선다면, 시민의 자조적 결사체가 국가와 시장의 실패를 보완하고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면, 마을과 동네에서 민이 주민으로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시민권’을 자각하고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로 나선다면, 민주공화국과 질 높은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것은 최고정책결정자도, 행정관료도, 사법부도, 노사도, 언론도 아닌 바로 ‘시민들 자신의 연합된 힘’임을 자각한다면, 나아가 이런 힘이 대의민주주의 한계를 보완하고 그 혁신을 자극한다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숙의민주주의를 강화하려는 노력이 풀뿌리 단위에서 다채롭게 움트는 가운데, 2022년 11월29일 오후 서울 강서구 케이비에스(KBS) 아레나에서 2022년 제3회 대한민국 선배시민 대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대의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할 새로운 대안, 나아가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새로운 혁신은 이렇듯 간과되고 배제된 정책행위자로서 민이 자신의 위상을 정립하고 역할을 다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의대정원 증원이나 연금개혁 등 최근 이슈가 된 정책 결정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김주형(서울대), 서현수(한국교원대) 교수 등 일단의 학자들이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모색으로 제시하는 ‘민주적 혁신’(시민 참여의 확대와 심화를 통해 전통적 대의제 정치를 쇄신하고 재구성하려는 제도, 과정, 운동)도 결국 요체는 ‘민’의 역할 강화다.

끝으로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배제된 정책행위자인 ‘민’이 더는 구경꾼이나 들러리가 아닌 정책 결정자 혹은 적어도 의미있는 참여자로서 위상을 정립하는 그날을 고대한다. (끝)

이창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책 행위자를 탐구하는 이 연재칼럼 집필에 매진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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