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의 언어탐방] 빈티지: 단순히 ‘옛것’이 아니다
김용석 | 철학자
언어도 생물처럼 진화한다. 빈티지(vintage)라는 말은 포도밭에서 태어났지만, 도시 사람들의 문화적 성향을 가리키는 말로 진화했다.
빈티지는 포도 수확을 뜻하는 라틴어 빈데미아(vindemia)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말이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거치면서 조금씩 의미 변화를 일으켰는데, 프랑스어와 영어에서는 특정한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뜻하는 말로 전이되기도 했다. 나아가 ‘빈티지 와인’이라는 이색적 표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포도 농사가 잘된 해에 양조한 고품질 포도주라는 의미로도 확장되었다. 이런 언어진화 현상은 포도주의 전통이 서구 문화에서 각별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빈티지는 포도밭을 떠나 폭넓은 문화현상에도 적용되었다. 20세기 들어서 디자인, 스타일, 패션 등과 결합해 특별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낡고 오래된 것. 또는 그러한 느낌이 나는 것’이라거나, ‘숙성된 포도주처럼 오래되어 좋은 것이라는 의미의 복고풍 디자인, 골동품 등’을 가리킨다고 설명하지만, 문화사적으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빈티지의 개념은 20세기와 21세기의 문화적 특성과 ‘역설적으로’ 연관이 깊다. 이 시기의 문화는 ‘새로움과 변화의 역동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 즉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 변화를 불러오는 일들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새로움의 탄생은 변화와 어깨동무한다. 새로움의 탄생은 변화를 불러오며, 변화는 새로움을 동반한다. 변화의 흐름이 새로움의 연속으로 구성되듯이, 새로움의 얼굴은 변화의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변화와 새로움은 서로 의미의 호환성을 지닐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변화의 기획은 새로움의 제시를 내포한다. 오늘날 이런 경향은 가속화되고 있다. 다방면에서 인간의 창의력이 더욱 요구되는 것도 이런 경향과 밀접하다. 오늘날 세계는 새로운 것들의 창출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새로움과 변화의 추구는 또한 전적으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화적 인간에게는 현재의 변화와 미래를 향한 의지만 있는 게 아니다. 의식의 작용에 따른 역사가 있다. 역사는 인간이 지닌 보존 능력의 발현이다. 보존은 기억하기 위해서다. 기억하고 상기하는 일은 언뜻 새로움과 연관이 없어 보인다. 이미 지난 것, 낡은 것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거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은 현재의 사람에게 새로운 의미를 얻게 한다. 해석학의 대가 한스게오르크 가다머가 주장하듯 과거를 상기하고 과거의 사실을 재해석하는 것은 ‘의미를 위한 새로운 기획’이다. 그의 말처럼 “새것은 곧 헌것이 되고, 헌것은 언젠가 새것처럼 나타난다.” 새로움은 뒤에도 있다. 인간 정신은 앞과 뒤 모두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추억’들은 우리 삶의 새로운 의미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빈티지의 의미는 새롭게 부상한다. 빈티지를 찾는 사람들의 미적 시선은 과거를 향해 있다. 그렇다고 모든 낡은 것과 오래된 것을 찾는다는 뜻이 아니다.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도 아니다. 빈티지를 이해할 때 핵심은 ‘시대’(epoch)라는 개념이다. 단순히 시간적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특정 시대의 문화적 의미를 반추하고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빈티지의 어원적 고향인 포도주의 경우에도 ‘오래됨’이 아니라, 포도 수확과 양조 ‘연도’가 핵심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빈티지의 개념에서도 과거, 낡음, 오래됨이 주된 요소는 아니다.
빈티지는 ‘한 시대의 예술적 탁월함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옷, 건축, 자동차, 문구, 소품 등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인간의 보존과 상기 능력으로 형성된 문화적 아카이브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평가받은 옛것을 탐미적 시선으로 다시 불러와 향유하는 것이다. 그들과 문화적으로 새롭게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빈티지는 레트로(retro), 앤티크(antique) 등과 다른 개념이다. 전자는 ‘뒤로 돌아간다’는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간적으로 현재보다 ‘뒤에 있음’에 방점이 있고, 후자는 ‘아주 오래되었음’에 방점이 있기 때문이다.
빈티지는 또한 전적으로 미래를 향한 변화의 급류에서 이탈하고자 한다. 새로움의 빠른 유영과 변화의 급류가 한 몸이 되어 전진하는 과잉 생산의 상황에서 ‘일정 시대에 의식적으로 멈춰’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변화와 새로움의 동반자 개념에 균열을 내는 것이며, 변화에 엇박자를 내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품을 동력으로 변화를 앞세운 시대에 대한 반성일 수도 있다. 이는 빈티지 클로딩(vintage clothing)이 ‘친환경적이고 지속가능한 패션’과 ‘슬로 패션’의 경향을 보이는 사례들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은 현재 급히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새로운 것들은 ‘가치 평가 이전의 새로움’이라는 의혹과도 연관 있다. 빈티지는 한 시대에 이미 평가받은 것들 가운데서 ‘평가의 기억을 되살리는 새로움’이기 때문이다.
이에 빈티지의 서사적 특징 또한 소중하다. 빈티지에는 역사의 흔적 또는 이야기의 편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빈티지는 서사가 담겨 있는 예술 형식인 데 반해, 현전하는 새로움들은 아직 부박하게 ‘서사 없는 형식’이 난무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빈티지는 가구든, 장식품이든, 장난감이든 ‘어떤 시대의 특정한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고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현재 변화의 흐름에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이때 시대는 시간을 초월한다.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다른 한 시대에 머물러 보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서사와 상징으로서 빈티지는 결국 우리의 감각과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곧 새로움의 다양성을 확장해준다. 미학적으로는 탐미적 통로이자 미적 다양성의 창구이다. 이런 문화적 시도는 또한 실용적이다. 우리 일상을 풍성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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