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IT 프로그래머서 수제맥주집 대표로 변신… 창업하고 선곡부터 한 `맥덕`
외국계 IT기업 프로그래머 출신
음반 프로듀서·무대감독도 경험
초창기 하루 매출 300만원 넘어
'생활 맥주' 전국 250여개 매장
직영만 47개… 직원 500명 달해
내년 상반기 코스닥 상장 추진
이르면 내달말 싱가포르 진출
서울의 대표적인 오피스 밀집 지역 중 한 곳인 여의도. 높게 솟은 마천루와 재건축을 기다리는 노후 아파트들이 섞여 있는 가운데, 평일 낮시간 이 곳 직장인들의 표정은 대체로 마르고 각박하다. 빌딩 아케이드 상가에서 끼니를 때우는 이들마저 사라지는 퇴근 시간 이후와 주말에는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라는 화려한 이름은 오간 데 없이 허전하기만 하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인가 이 곳에 꽤 이채로운 풍경이 나타나곤 했다. 낡은 아파트 상가의 작은 맥줏집. 길거리까지 흥겨운 음악소리가 흘러 나오고 와이셔츠를 단정하게 입은 남자들이 돗자리를 깔고 맥주를 마셨다. '생활맥주'는 그렇게 여의도의 명물이 됐고, 지금은 전국 250여개 매장을 거느린 외식사업체로 성장했다.
첫 매장이 있던 여의도 상가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생활맥주 운영사 데일리비어 본사를 찾아 임상진(52·사진) 대표를 만났다. 외국계 IT기업 프로그래머 출신인 임 대표가 수줍어하며 밝힌 약력은 길고 일관성이 없어 보였다. 그는 밴드 세션과 보컬리스트를 맡은 적이 있고, 음반 프로듀서와 무대감독도 지냈다. 무역업에 뛰어들어 프리미엄 청바지와 철강을 수입하는 일을 한 적이 있고, 나중에는 참치집을 차려 돈을 벌었다. 직업을 수없이 바꾸는 중에도 그가 가졌던 한가지 아이덴티티는 장안의 유명한 '맥덕(맥주 덕후)'라는 것이었다.
"2014년 5월 여의도에서 '무권리'로 나온 10평짜리 가게를 열었는데, 그때만 해도 수제 맥주는 이태원에서나 마실 수 있는 것이었고 가격도 상당히 비쌌어요. 가게를 열고 수제 맥주를 싸게 파니까 손님이 몰리더라고요. 나중엔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는데,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매장에 자리가 없으면 길에 돗자리를 펴고 드시더라고요."
당시 하루 매출이 300만원까지 올랐다. 가맹점 모집을 하지도 않았는데 매장이 잘되니 가맹점을 내자는 사람들이 또 줄을 섰다. 현재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생활맥주의 지점은 총 250개가 있고, 이중 직영이 47개다. 직원도 본사 직원 외 알바 등 일용직을 포함하면 500명까지 불어났다.
"요식업은 결국 10평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효율이 가장 높고 오퍼레이션(운영)도 가장 용이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가맹 1호점(한남점)부터 3호점까지 전부 그 정도로 작은 가게들이었어요. 처음엔 제가 직접 매장 보드에 글씨를 쓰면서 도와드렸어요."
생활맥주는 국내 60여개 맥주 양조장과의 협업을 통해 특색있는 맥주들을 소개한다. 판로가 없는 양조장은 자신의 맥주를 알릴 수 있고, 고객들은 집 앞에서 매달 새로운 맥주를 만날 수 있는 수제 맥주 플랫폼이 되는 게 그의 목표였다. "수제 맥주도 국산만 유통하는 것이 제 신념이에요. 빠르게 발전한 우리 수제 맥주들은 지금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엔 어려움이 많았죠. 케그(맥주를 담아 판매하는 용기)도 없어 대형회사 맥주의 케그를 구해다가 쓰기도 하고, 따라도 따라도 거품만 나오는 맥주도 있었고(웃음)."
유통업자로서 양조장들에 피드백을 주고 개선에 개선을 해나갔다. 눈이 오고 날이 궂은 날도 직접 차를 몰아 전국의 양조장을 돌았다. 그렇게 지난 2015년 '한국 맥주가 북한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도발적인 카피로 공전의 히트를 친 '대동강 페일 에일'이 탄생했다. 덴마크의 유명 양조장 미켈러와 한국 더부스가 합작했고, 생활맥주가 대동강 페일에일 생맥주를 유통했다.
임 대표는 프로그래머 출신이란 강점을 살려 업무를 전산화했다. 주류업계는 의외로 폐쇄적이고 보수적이어서 발주 등 주요 업무는 여전히 문자와 카톡으로 이뤄졌다. 임 대표는 나이 많은 점주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앱(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각 지점에서 간편하게 주류를 주문하고 재고를 관리할 수 있게 했다. 점주들의 불편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만들어나가면서 믿음을 얻었다. 현재 3년 이상 운영매장이 전체 매장의 70%에 달한다.
앱 개발 외에 임 대표의 의외의 전력이 생활맥주를 통해 다시 빛났다. 음악가였던 그는 업장의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직접 만들었다. 메뉴 개발보다 술맛나는 음악 고르기를 먼저 했다. "자영업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가게의 분위기를 만들고 정체성을 드러낼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걸 잊고 있는 것 같아요." 치맥을 즐길 수 있는 생활맥주의 배경음악으로는 1950~1960년대 펑키한 팝들을 선곡했다. 대화를 방해할 수 있는 기타 사운드 곡은 제외했다. 거의 1년어치를 모두 선곡해 매장에서 플레이했다.
재주 많은 '맥덕' 대표에게 혹시 직접 맥주를 만들 계획이 있냐고 물었다. 연신 손사레를 친 그는 " 홈브루잉이라고 하죠. 3주를 묵혀 맥주를 집에서 만들어 봤는데요. 못먹겠던데요(웃음)" 현재는 생활맥주 소유의 양조장을 통해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생활맥주는 올해 해외 진출을 앞두고 있다. 이르면 3월 말 싱가포르에 생활맥주와 치킨 브랜드 생활치킨이 진출한다. 각국에서 마약 다음으로 규제 많은 아이템이 주류다. 국내 맥주를 가지고 나가는 건 세금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면 서울의 맛을 어떻게 세계에 전할까. 고민 끝에 그는 남산에서 직접 채취한 효모를 가지고 나가 싱가포르 현지 양조장과 협업을 통해 수제 맥주를 만들기로 했다. 현지에서도 환영하는 아이디어였다.
국내 수제맥주 프랜차이즈 브랜드 1위 생활맥주는 2021년 한 해를 제외하고 10여년간 지속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2023년 추정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295억원, 44억원이다. 작년에는 KB증권을 주관사로 선정하고, 코스닥시장 상장 절차에 착수했다. 올해 말엔 상장 심사 신청을 마치고 내년 상반기 상장하는 것이 목표다.
"외식 기업이 직상장한 사례는 교촌에프앤비뿐인 것 같아요. 20년 외식인으로서 외식기업이 상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압니다.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상장에 성공해 우리 외식기업도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임 대표는 업계에서 '마크 아범'으로 불리는데, 사실 맥덕들 사이에서 그보다 유명한 건 회사에서 마크 이사님이라 칭하는 임 대표의 반려견 '마크'다. 임 대표는 유기견이었던 마크를 구조한 일을 계기로 유기견 보호 활동을 후원하는 맥주도 기획하고, 댕댕이 페스티벌 등의 행사도 진행했다. 생활맥주가 상장에 성공한다면 마크가 한국거래소의 상장 기념식에서 함께 북을 치지 않을까. 귀여운 한 장면이 그려진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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