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윤 대통령 신년대담이 알려준 몇가지 사실들
최혜정 | 논설위원
설 연휴를 앞둔 지난 8일 공개된 윤석열 대통령의 음악 영상 메시지는 ‘화제성’ 면에선 단연 성공적이었다. 비록 영상 댓글 중엔 “와이어로 대통령이 하늘로 날아가서 빛나는 태양이 되는 연출이었으면 백점 만점이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하는 반응도 있었으나, 대통령이 직접 연기와 노래까지 소화하는 기획은 날이면 날마다 오는 이벤트가 아니다. 이 흔치 않은 광경이 기자들과 출근길 문답(도어스테핑)을 하던 대통령실 로비에서 촬영됐다는 것은, 쌍방향 소통이 윤 대통령의 독무대로 대체된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의무인 기자회견을 일대일 대담으로 퉁친 담대함과도 일맥상통한다.
전날 방송된 한국방송(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 역시 명절 밥상의 주요 메뉴가 됐다는 점에선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 같다. 대통령실 로비에서 어린이들이 공놀이하는 것만큼이나 뜬금없는 다큐식 구성, 대통령이 답하기 좋게 배려하느라 애처롭기까지 했던 질문, 명품백을 명품백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 방송’ 논란에 더해 이를 설날 아침에 재방송한 한국방송의 결기까지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생산해냈다.
다만 ‘드디어’ 입장을 밝힌다고 홍보했던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의혹은 “매정하게 끊지 못해” 벌어진 일로 정리됐고, 대통령이 답했어야 할 민감한 현안은 테이블 위에 오르지도 못했다. 그저 100여분에 걸친 윤 대통령의 발언을 곱씹다 보면, 그의 의식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게 성과라면 성과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을 해명하면서, “대통령이나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도 이렇게 박절하게 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한 이들이 문제라고 했다. 자신이라면 “26년간 사정업무에 종사했던 디엔에이(DNA)”로 단호히 대했을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사정업무 디엔에이’가 각인돼 있다면 법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히는 것이 합당하다. 김 여사 앞에선 그 디엔에이마저 무력화된다는 점을 자인했다.
또한 정 많은 김 여사가 ‘매정하게 끊지 못한’ 인사가 명품백을 들고 온 최재영 목사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김 여사가 ‘박절하지 못해’ 만난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받은 선물은 무엇이고 어떻게 처리됐는지 등 의구심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 ‘관심법안’인 개식용금지법 외에도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많이 논의하느냐”는 물음에 “비교적 아내하고 뭐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고 했다. 김 여사와 국정을 상의하고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밝힌 셈이다. 김 여사의 “남북 문제에 좀 나설 생각”이라는 발언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얘기다.
윤 대통령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지 않는 이유로 “여당 지도부를 무시하는 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지도부를 직접 만나는 것이 “대통령으로서 집권 여당의 지도부와 당을 소홀히 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은 대부분 입법이 뒷받침돼야 힘을 얻는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1야당이 반대하면 한발짝도 나갈 수 없는데도, ‘여당 마음 상할까 봐’ 야당과 따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야당이 발목 잡아 일을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론 국정과제 추진이 그리 급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여야 먼저 만나고 오라는 것은 스스로를 여야 지도부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다.
윤 대통령은 이번 대담을 준비하며 참모들이 건넨 예상 질문과 답변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국민 앞에 설 때 대통령실 참모진과 숙의해 국민이 듣고 싶은 말을 준비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다. 그랬다면 적어도 명품백 수수 의혹을 배우자의 모질지 못한 처신 정도로 축소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의 즉흥 대담은 그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말고는 어떤 의미도 찾기 어렵다.
대통령실이 자평한 대로 “대통령으로서의 무게와 신뢰” “소탈하고 진솔한 모습”이 드러났는지는 국민이 판단할 몫이다. 다만 대통령의 노래에도, 대통령실 구석구석을 다닌 다큐 대담에도 막상 국민이 들어야 할 이야기는 빠져 있다. 소통 요구에 ‘쇼맨십’으로 답하는 것은 자신감 결여로 비칠 뿐이다. 대통령실은 “이번 방송 대담이 끝이 아니고 그동안 검토했던 소통 방식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했다. 불통의 굴레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대통령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id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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