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900쪽짜리 ‘트럼프 공약집’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의 재선 캠페인에 탄력이 붙을수록 ‘트럼프 2기’가 궁금한 사람들이 밑줄 쳐가며 읽는 보고서가 있다. 헤리티지재단을 중심으로 80여 보수 단체가 뭉친 ‘프로젝트 2025′가 지난해 출간한 ‘보수의 약속’이다. 900쪽짜리 공약집은 보수 정부가 들어설 경우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데이원’부터 할 일과 분야별로 정부 부처가 추진할 과제를 상술했다. 트럼프 캠프가 공식 발표한 것은 아니지만 트럼프 1기 때 고위 관료와 측근들 다수가 집필에 참여해 사실상의 ‘트럼프 공약집’으로 통한다.
막후에서 보수의 어젠다를 고민하고 이를 공약으로 만들어 차기 지도자에 들이민 건 미국 보수의 유구한 전통이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라 불린 80년대 경제 전성기도 이런 토대 위에서 가능했고,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50년 만에 상·하원을 싹쓸이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대선을 앞두고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학자·사상가 400여 명이 재능 기부를 통해 청운(靑雲)의 꿈을 가진 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내용은 개인의 자유나 자치 같은 거창한 보수 이념부터 정부의 구매·조달, 언론 대응법까지 거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 “임기 첫날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즉시 전력’을 양성해 트럼프 1기의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졌다.
이 프로젝트에 투입된 예산 약 300억원 중 대부분을 뜻있는 보수 시민들이 십시일반 보낸 기부금을 모아 조성했다. 대통령의 권한을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해석했고 일부 내용은 이른바 ‘매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 불리는 극단적 지지자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은 “바이든 대통령이 우리 정책을 수용하겠다면 도울 것”이라 말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보수의 미래를 생각해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여기 있었다.
양복 안쪽 주머니에 헌법 전문(全文)이 실린 핸드북을 항상 넣고 다닌다는 총괄 책임자가 수화기 넘어 1시간 동안 열변을 토하는 걸 들으며 한국 보수가 겹쳐 보였다. 여당은 2년 전 외부에서 들어온 대선 후보의 개인기에 의존해 대선을 치른 데 이어 이번 총선도 새 얼굴로 맞이한다. 비대위와 공관위에 포진한 외부 인사 면면을 보면 선망받는 커리어를 쌓아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과거 보수 정당에 어떤 기여를 했고 보수의 미래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알기 어렵다. 이렇게 된 건 보수의 리더들이 양지(陽地)를 좇기 바빠 후학 양성은 소홀했기 때문이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과거 ‘20년 집권론’을 말해 지금까지도 비판을 받고 있지만 보수 정당에선 그런 큰 그림을 구상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 결과 이번에도 선거 석 달을 앞두고 새 간판을 급조했고 높으신 분들은 양지에서, 청년들은 험지에서 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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