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양동이 속 외로움, 꿈, 그리고 희망[영감 한 스푼]

김민 문화부 기자 2024. 2. 12.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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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작가 장언리의 작품세계
장언리, ‘멀리서 온 손님(A Guest from Afar)’, 2023년, 캔버스에 유채, 200×400cm. ⓒ 장언리 Zhang Enli, 하우저 앤드 워스 제공
김민 문화부 기자
누군가를 마주할 때보다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빈자리에서 진실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저에겐 외삼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가 그랬습니다. 유쾌한 멋쟁이였던 그가 두고 간 집을 정리할 때 쏟아져 나오던 온갖 잡동사니들. 낡은 낚시 모자, 지포 라이터, 짝이 맞지 않는 그릇 더미, 베란다에 쓸쓸히 놓인 화분들은 온 가족을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죠.

중국의 주목받는 현대미술가 장언리(張恩利·59)의 빈 양동이 시리즈를 보면 저는 그것을 스쳐 간 사람들의 외로움과 절망, 꿈과 희망이 떠오릅니다. 최근 하우저 앤드 워스 홍콩 갤러리에서 개인전 ‘얼굴들’을 통해 신작을 공개한 그의 작품 세계를 공유합니다.

빈 양동이, 상자와 고무호스

영국 테이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장언리의 ‘양동이’ 연작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놓인 듯한 양동이를 여러 각도에서 그리고 있습니다. 걸레를 빨거나, 더러워진 물을 나르거나, 필요하면 언제든 쓸 수 있게 아무렇게나 놓인 양동이입니다.

장언리는 2000년대에 이렇게 일상 속 보잘것없는 사물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을 그렸습니다. 양동이뿐 아니라 텅 빈 욕조, 바닥에 멈춰 있는 공, 뚜껑을 쩍 벌린 상자, 리드미컬하게 엉킨 고무호스 등이 소재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일상 연작들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렸지만, 마치 수채화처럼 아주 얕게 채색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그 물건의 기하학적 형태보다 표면의 느낌이 더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텅 빈 내부가 마치 깊은 구덩이처럼 시선을 빨아들이는 효과가 극대화되는데요. 이렇게 그림을 곱씹어 보면 결국 중요한 건 물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길’임을 느끼게 됩니다. 양동이가 아니라 바닥에 무심코 놓여 있는 그 양동이를 가만히,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 시선과 함께 우리는 양동이의 깊은 구멍이 열어 주는 문을 열고 상상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잿빛 물이 가득 찼다 비워지기를 반복하며 양동이가 지나왔을 일상의 많은 시간들. 그 시간을 분주히 살아가며 삶의 희망을 다져 나갔을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의 모습을….

제 살을 깎아 먹는 푸주한

장언리, 정육점(2)(Meat Market(2)), 1997년, 캔버스에 유채, 169.7×149.7cm. ⓒ 장언리 Zhang Enli, 작가 제공
장언리의 일상 사물 연작에는 맥락이 있습니다. 이 연작이 나오기 전 1990년대에 그는 도시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푸주한(Butcher)’ 시리즈죠.

1993년에 그린 ‘쇠고기 두 근(Two Jin of Beef)’처럼 거칠고 적나라한 표현이 두드러집니다. 쇠처럼 굳은 얼굴을 한 푸주한의 앞에 놓인 고깃덩어리와 그의 팔이 마치 같은 고기인 듯 비슷한 질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어깨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고요. 이 무렵 작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던 도시 상하이에서 대학 강사로 일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죠.

“캠퍼스의 작은 기숙사에 살며 한 달에 100위안(약 2만 원)을 벌었고 시간은 남아돌았다. 그림 그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나날이었고, 우울감이 자주 찾아왔다. … 집 맞은편 큰 시장을 오후마다 들렀고, 내가 고기를 좋아했기에 정육점을 늘 구경했다. … 90년대 초반 난 이런 문장을 썼다: ‘우리 모두는 도마 위에 놓인 고기다. 어쩌다 한 번씩 푸주한 노릇을 할 뿐….”(2017년 이숙경 큐레이터와의 이메일 대화에서 발췌)

빽빽한 빌딩 숲에서 서로 먹고, 먹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는 이 무렵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그림에서 사람이 사라졌고, 그 대신 그들의 흔적이 남은 사물들이 캔버스를 대신 채웠죠.

사라진 테두리, 흔적의 지도

하우저 앤드 워스 홍콩 개인전 ‘얼굴들’에서는 최근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 작품에서는 화면 위에 선과 색들이 서로 리듬을 맞추듯 둥둥 떠다닙니다. 장언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흔적을 남긴다”며 “벽이나 하늘을 보면 흔적이 가득하다. 이 흔적들에 사람의 이름을 붙이면 보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전시장 속 작품은 추상화처럼 형태가 없지만, 제목은 구체적입니다. ‘멀리서 온 손님’, ‘미술관장’, ‘멜론 농부’ 등의 제목이죠. 그리고 전시의 제목은 ‘얼굴들’. 마치 얼굴 없는 표정만으로 특정 인물에 대한 감각을 드러내려는 듯합니다. 그가 “누군가의 뒷모습도 초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밝고 경쾌한 색채가 돋보이는 작품들은 이제 다시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쓸쓸하고 절망스러웠던 도시의 군상에서, 텅 빈 공백으로 향한 다음, 이제는 마음에 들어 있는 각자의 꿈이나 욕망, 그로 인한 희망과 약간의 좌절을 지도처럼 펼쳐 놓습니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지는 작업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흔적’과 ‘저 너머’의 무언가를 통해 세상을 이해해 보려는 작가의 시선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50년 동안 발전해 온 내 생각은, 내가 보는 시각과 그에 얽힌 나의 경험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세계가 중요한 사건이나 하나의 특별한 이벤트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오히려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수많은 것들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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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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