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김영희 칼럼]

김영희 기자 2024. 2. 12.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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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대담으로 윤 대통령이 이제 김건희 리스크를 우려할 정도가 아니라 ‘수렁’에 빠졌음이 분명해졌다.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김 여사 문제는 계속 호출될 것이다. ‘김건희 악재’를 딛고 여당이 이긴다면 당은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더 가속할 것이고, 야당이 이긴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지난 7일 방영된 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박장범 KBS 앵커가 대통령실 복도에 걸린 사진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KBS뉴스 유튜브 갈무리

김영희ㅣ편집인

설 연휴 화제는 윤석열 대통령의 무사과와 위르겐 클린스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무전술 문제로 팽팽히 나뉘었을 듯하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국민 기대와 거리가 멀다는 점에선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국민 정서에 무감한 것도 닮았다.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 사망 사건 및 수사 논란이 큰데도 윤 대통령은 연휴 기간 해병대를 찾아 “올해는 국운이 뻗치려나 보다”고 말했다. 손흥민을 비롯해 선수들이 돌아가다시피 사과하는데도 클린스만 감독은 미소 천사 역할에만 열심이다.

윤 대통령의 한국방송(KBS) 대담 의도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로 인한 여론 악화를 설 전에 막아보려는 것이었다면 완전한 실패였다. 사과와 함께 최소한의 조처라 예상됐던 제2부속실 설치마저 원점으로 돌린 대담은 김 여사의 그림자를 외려 짙게 했다. 김 여사와 찍은 사진들을 클로즈업하고 나서 개 식용법 금지법안을 말한 데 이어 명품 가방 수수 문제로 넘어가는 14분 분량 과정은, 김 여사의 ‘따뜻함’을 전하기 위해 공들여 짠 연출로 비칠 수밖에 없다. 보수언론마저 첫날부터 ‘많이 아쉽다’ ‘내용·형식 모두 미흡’ 같은 제목의 사설을 썼다. 다음날 공개한 설 영상 메시지에서 김 여사 없이 대통령이 나와 ‘사랑이 필요한 거죠’ 합창의 솔로 파트와 연기까지 한 노력도 빛이 바랬다.

케이비에스 대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나 북한에 대한 발언이 평소의 날 선 톤에 비해 점잖아진 건 눈에 띄었다. 전 정권 탓도 없었다. 1년 전 조선일보와 한 단독 신년 인터뷰에서 이태원 참사에 대해 “정무적 책임도 책임이 있어야 묻지”라던 기세등등한 태도와 비교가 됐다. 김 여사 사안을 ‘매정하게 못 끊은’ 문제 정도로 넘어가려니, 다른 사안에 날을 세우기도 곤란했을지 모르겠다. 한 지인은 “공천에 대한 발언에서도 느꼈지만 다른 건 당이 알아서 하되 김 여사 문제만은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감상을 내놨다.

그래서일까, 집권 1년9개월 된 대통령의 대담이 맞나 싶을 정도로 국정에 대한 의욕은 읽기 힘들었다. 백번 양보해 다수 언론사가 참여하는 신년 회견에서 김 여사 문제에 질문이 집중될까 우려했다면, 여러 비판을 뿌리치고 강행한 녹화 대담에서 국정의 방향이라도 제대로 보여줬어야 한다. 잦은 거부권 행사 같은 논쟁적 사안에 대해 국민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모습은 없었다. 늘봄학교, 대출금리 등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사안에 대한 언급은 그동안 나온 수준에 그쳤다. 짚을 만한 정책 내용이 없으니 대통령의 무심함과 정무감각 부족은 더 입길에 올랐다. 대통령 부부가 ‘박절하지’ ‘매정하지’ 못했음을 반복할 때 이태원특별법에 거부권 행사를 말아 달라고 엎드려 호소하던 유가족들이 떠올랐다. 연구개발 예산 삭감으로 과학기술계를 발칵 뒤집어놓고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건 또 뭔가. 1년 전 인터뷰에선 “국민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태도, 대통령다움이라는 게 어떤 건지 고민하고 있다”며 낮은 지지율을 돌아보려는 모습이라도 보였지만, 이젠 ‘다른 국가도 다 그렇다’로 넘어가려 한다. 대통령에게 국민과 국정은 어떤 의미인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고백하자면 그간 김 여사의 처신이 논란이 될 때면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논문 표절부터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연루 의혹까지 여러 문제가 있음을 알면서도 국민이 선택했다는 사실의 무게도 있거니와, 그에 대한 비판에 여성 비하적 시선이 깔려 있다고 보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품 가방 수수는 복잡한 다툼을 거쳐야 하는 ‘의혹’이 아니라 온 국민이 영상으로 목격한 사실이다. 영부인의 ‘튀는 사진 찍기’ 같은 유와도 차원이 다르다. ‘진정한 사과’는 대통령의 공적 판단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최소치였다. 대담은 그런 상식적 요구마저 무참히 깼다.

연극은 끝났다. 당장 김 여사의 공식 석상 복귀가 언제일지 설왕설래고,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처럼 이를 위한 군불 때기에 나선 이도 있다. 다만 이로써 여론이 누그러질 것이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이번 대담으로 윤 대통령은 이제 김건희 리스크를 우려할 정도가 아니라 ‘수렁’에 빠졌음이 분명해졌다. 총선 결과와 관계없이 김 여사 문제는 계속 호출될 것이다. ‘김건희 악재’를 딛고 여당이 이긴다면 당은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더 가속할 것이고, 야당이 이긴다면 두말할 나위 없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경율 비대위원이 윤 대통령의 ‘아쉽다’는 표현을 두고 “이제 아들(당)이 두들겨 맞으면서 총선 때까지 가야죠”라고 연휴기간 말한 것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이를 피할 수도 있었을,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대통령 스스로 걷어찬 게 몹시 유감이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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