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류업계 관계자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행을 선도하는 MZ세대들이 위스키와 하이볼 등을 즐기는 요즘. 오히려 와인의 인기가 주춤하단 것입니다. 신의 물방울이라 불리는 와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과실주인데요.
잠깐 주춤하겠지만 클래식은 영원하단 말이 있듯이 또다시 와인의 인기가 높아질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뜬금없이 또 무슨 와인 이야기냐고요. 사실 오늘의 주인공이 바로 야심 차게 무알코올 포도주를 만들려다 실패했지만 어부지리로 세계 최초의 포도주스를 만든 사나이, ‘토마스 웰치’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서 건너온 꼬마, 목사가 되다
토마스 브램웰 웰치는 1825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영국 글래스톤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이던 1834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뉴욕 워터타운의 공립학교를 다니며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웰치는 17살이 되던 1843년 웨슬리안 감리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며 종교관과 가치관을 형성해나갑니다. 그가 속한 감리교는 노예제도를 반대했고 술에 대해서는 제조 뿐 아니라 구매 및 음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종교의 영향이었을까요. 그는 10대 시절 내내 미국 남부의 농장 등에서 탈출한 노예들을 캐나다로 수송시키는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는 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살이 되던 해 웨슬리안 신학교를 졸업하고 웨슬리안 감리교 목사가 됐습니다. 그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파운드라리와 허키머 카운티 등을 옮겨 다니며 사역했습니다.
이후 그는 뉴욕 중앙의과대학으로 진학했고 추후 진로를 바꿔 치의학을 공부해 결국 치과의사란 직업인으로도 일했습니다. 치과의사 웰치는 미네소타주 위노아를 거쳐 1865년 뉴저지주 바인랜드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뀝니다.
와인의 땅, 바인랜드에서 피어난 무알코올 포도주의 꿈
사실 동네 이름인 ‘바인랜드(Vine land)’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동네는 1861년 필라델피아 출신 부동산 개발업자 찰리 랜디스가 조성한, 포도 재배에 적합한 토양과 날씨를 갖춘 계획개발지구였습니다. 특히 랜디스 역시 감리교인으로 엄격히 절제된 삶을 살고 이 곳에서 난 포도를 교리대로 발효되지 않은, 무알콜 포도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랜디스는 이탈리아 출신의 포도생산업자들에게 땅을 내주고 개간시켜 포도 재배지를 꾸렸고 프로젝트 시작 5년만인 1865년 이곳 인구는 5500명으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곳 바인랜드의 초기 거주자 중 한명이 바로 웰치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뉴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웰치는 뉴욕과 가까운 뉴저지인 데다 가족인 여동생도 있는 바인랜드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이 곳의 감리교회를 다니며 지역의 치과의사로 일하며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치과의사이자 독실한 종교인으로의 삶을 살아간 웰치에겐 한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다니는 감리교회의 교리에 따르면 엄격하게 술을 금하는 금주를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감리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주최하는 만찬, 즉 성찬에는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만 사용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발효가 되면서 사람을 취하게 는 알코올 성분이 나오기 때문에 이를 배제한 포도주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인데 전통적으로 건포도를 끓이거나 방부제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포도주를 준비해왔습니다.
웰치는 포도주를 마시더라도 취하지 않았으면 했고 번거로운 전통적 방법 대신 좀더 쉽고 효과적으로 무알코올 포도주를 만들면 어떨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온살균법으로 만든 무알코올 와인, 시장에서 외면받다
그렇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과 때마침 인류의 건강권에 큰 영향을 미친 파스퇴르 박사가 개발한 ‘저온살균법’을 응용해 알코올 성분을 제거한 포도주 만들기에 도전합니다. 바인랜드에서 널리 재배되는 콩코드 품종 포도를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1869년 알코올을 만들어내는 효모를 파괴하는 저온살균법을 적용해 취하지 않는 포도주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다니고 있는 교회와 지역 커뮤니티에서는 이 무알코올 포도주를 성찬식에 채택했고 이 포도주는 ‘웰치 박사의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Dr. Welch’s Unfermented Wine)‘라고 불렸습니다.
웰치는 곧바로 이를 상품화해 판매에 나섰지만 생각보다 인기가 없었습니다. 포도주는 태생적으로 포도를 발효시켜 알코올 성분이 포함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인위적으로 제거한 무알코올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죠. 시장은 웰치스의 혁신적인 상품을 외면했고 토마스 웰치는 결국 4년만에 사업을 중단합니다. 이렇게 웰치의 발명품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후 수년간 웰치의 무알코올 포도주는 기억 속에서 잊혀 갔습니다.
무알코올 와인이 포도주스로 둔갑했더니 흥행대박!?
그렇게 웰치의 발명품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그 때 귀인이 나타납니다.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찰스 웰치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치과의사가된 찰스는 학업을 마친 뒤 1875년 아버지가 있는 바인랜드로 오게 됩니다.
아버지의 무알코올 포도주를 살펴본 그는 탁월한 마케팅 감각을 동원하며 발상의 전환을 꾀합니다. 바로 ‘발효되지 않은 와인’이라는 길고 거부감있는 이름 대신 웰치스 포도주스 (Welch’s Grape Juice)라고 요즘 표현대로 리브랜딩을 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계 최초의 포도 주스의 탄생입니다. 찰스는 치과의사로 일하는 틈틈이 아버지가 만든 포도주스를 판매했습니다.
찰스는 아예 아버지와 함께 ‘Welch’s Dental Supply Company‘라는 회사를 만들고 이곳에서 치아 건강 관련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잡지 등에 포도 주스의 효능 등을 홍보하며 조금씩 대중적 인지도를 쌓아올려 갔습니다 . 그러던 1893년, 찰는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기회를 포착합니다. 수많은 투자자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모인 이 곳에서 웰치스 포도주스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 것입니다. 맛있고 건강에 좋은 프리미엄 포도주스에 대한 인기는 나날이 높아져 갔습니다.
1919년 미국 금주법, 웰치의 전성기를 가져오다
성공한 브랜드가 언제나 그랬듯이 천운도 따랐습니다. 바로 1919년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된 것입니다. 맥주, 증류주 등 생산과 판매가 금지됐고 와인도 예외가 아녔습니다. 당시 농가는 일제히 와인 생산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사라진 포도주의 자리를 실패했던 무알코올 포도주,웰치가 차지했습니다. 웰치 포도주스의 화려한 부활이 펼쳐진 셈입니다.
이후 웰치는 적포도주스 뿐 아니라 청포도주스, 오렌지주스 등을 출시했습니다. 또한 국내에서는 톡톡 쏘는 탄산으로 더 유명한 웰치소다, 일명 웰치스 소다도 내놓으며 인기를 모읍니다. 웰치스 소다는 웰치 포도주스에 탄산을 첨가한 제품으로 국내서는 대부분 이 웰치스 소다를 접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은 거대 제국을 이룩한 수많은 성공한 브랜드가 그렇듯이 창업자는 이러한 영광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웰치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웰치는 1903년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뉴저지주 바인랜드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마신 포도주스 한잔이 사실은 한 종교인의 깊은 고민과 노력끝에 탄생한 것이라는 점에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부‘-랜드 ’전‘(傳). 흥부전은 전 세계 유명 기업들과 브랜드의 흥망성쇠와 뒷야이기를 다뤄보는 코너입니다. 기자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더욱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