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넘는 트럼프 “나토, 돈 안 내면 러시아 공격 장려”

최혜린 기자 2024. 2. 12.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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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 중 과거 나토 정상회의 일화 소개
‘집단안보 무력화’ 발언에 동맹국들 ‘격앙’
BBC “지지자들 흥분시키는 전형적 수법”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들을 겨냥해 방위비를 충분히 늘리지 않을 경우 러시아가 공격하도록 부추기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놔 논란이 일고 있다. 그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동맹 무시’ 기조가 부활해 국제질서가 커다란 변화를 맞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코스털 캐롤라이나대에서 선거 유세를 하던 중 자신이 참석한 과거 나토 정상회의에서 오갔던 대화를 소개했다.

그는 당시 한 정상에게 ‘만약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러시아의 공격을 받으면 보호해 주겠냐’는 질문을 받았다면서, “나는 ‘당신은 돈을 내지 않았으니 채무 불이행’이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내지 않았다면) 당신들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들(러시아)이 무엇이든 내키는 대로 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당신들은 돈을 내고, 청구서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부터 나토 회원국이 방위비를 충분히 부담하지 않으면서 미국에 의존한다는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해왔다. 미국 내에 ‘나토에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많다’는 불만이 퍼져 있다는 점을 노려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무임승차를 비난하는 수준을 넘어 나토 회원국이 공격을 받으면 전체 회원국이 함께 대응한다는 집단안보 개념 자체를 무력화하는 발언을 내놨다.

2019년 영국 왓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 회의에서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앞줄 왼쪽)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유럽연합(EU)과 동맹국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11일 성명을 내고 “동맹이 서로 방어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면 미국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안보를 훼손한다”고 지적했다.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엑스(옛 트위터)를 통해 “나토의 안보와 관련한 무모한 발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도움이 될 뿐”이라며 “세계에 더 많은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했다. 블라디슬라프 코시니아크카미시 폴란드 국방장관은 “어떤 선거 운동도 동맹의 안보를 갖고 장난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을 겨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는 유럽의 반응이 “이례적이고 즉각적”이었다면서 “유럽 지도자들이 미국 대선이 불안한 세계에 미칠 영향을 얼마나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고 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11일 성명을 내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은 러시아가 폴란드와 발트해 국가들까지 공격해도 된다는 “청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끔찍하고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잇단 비난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11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대출 형태가 아닌 이상 어떤 나라에도 대외 원조 자금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AFP연합뉴스

외신들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제질서를 흔드는 ‘폭탄발언’을 했다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전·현직을 통틀어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도 적국이 동맹국을 공격하도록 부추기겠다는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면서 “이런 수사는 만약 그가 다시 당선될 경우 국제 질서에 광범위한 변화를 맞이할 것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NYT는 유럽 동맹국들이 미국을 의지할 수 없게 된다면 과거 한국전쟁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19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제외한 ‘방위선’(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지 5개월 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지적했다.

‘동맹 비용’을 강조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할 경우 한국의 방위비 압박이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NYT는 “그는 퇴임 직후인 2021년 인터뷰에서 ‘내가 집권한다면 한국에 주둔 미군 유지를 위해 매년 수십억 달러를 더 지불하라고 요구하겠다’고 밝혔다”면서 “그의 두 번째 임기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우선적인 과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BBC는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지지자들을 흥분시키는 그의 전형적인 수법”이라면서 이목을 끌기 위한 ‘일회성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나토와 서방이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여름 공세 실패로 위기를 맞은 상황을 고려하면 “위험한 시기에 나온 위험한 발언”이라면서 “푸틴이나 시진핑과 같은 미래 침략자가 미국의 동맹국 방어 의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오판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줄곧 강조해온 동맹들의 ‘무임승차론’에 대해서는 사실 왜곡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2006년 나토 회원국들은 각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2%까지 국방비 지출을 늘리기로 합의했으나 이는 국방예산을 충분히 확보한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의미였을 뿐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토의 자체 통계에 따르면 31개국 가운데 11개국만 이를 이행하고 있다.

NYT는 “그는 몇 년 동안 잘못된 전제에 근거한 주장을 반복적으로 펴고 있다. 고정관념을 바로잡을 의지가 없거나 원하는 이야기에 맞게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지적했다.

영국 국방 전문가 패트릭 버리 박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방비 지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한 미국의 분노를 반영한다”면서도 “그러나 그의 발언은 선을 너무 넘었다”라고 비판했다.

최혜린 기자 cher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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