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공신 윤흥신 장군 동상, 부산 초량동에 다시 우뚝

김영동 기자 2024. 2. 1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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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5년(1592년) 음력 4월14일 오후, 왜군은 1만명이 넘는 병사로 부산 동구 좌천동의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사하구 다대포에 이르렀다.

왜군은 내륙 진·출입에 긴요한 낙동강 수로를 확보해야 하기에 다대포진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재개된 전투에서 방어선이 뚫리자 윤흥신과 병사들은 퇴각하는 것처럼 위장해 왜군을 성안으로 유인한 뒤 기습했지만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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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초량동에 있는 윤흥신 장군 동상. 부산 동구 제공

선조 25년(1592년) 음력 4월14일 오후, 왜군은 1만명이 넘는 병사로 부산 동구 좌천동의 부산진성을 함락한 뒤 사하구 다대포에 이르렀다. 다대포는 경상좌수영 수군 진성이 있던 곳으로 낙동강으로 향하는 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 요충이었다. 왜군은 내륙 진·출입에 긴요한 낙동강 수로를 확보해야 하기에 다대포진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수백 척에 이르는 왜선을 본 부하장수가 “성을 나가 피하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했지만 다대첨사 윤흥신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찌 간다는 것이냐”고 호통쳤다. 왜군의 항복 권고를 단칼에 거절한 윤 첨사는 수백에 불과한 병사를 거느리고 온종일 전투를 벌여 성을 지켜냈다. 이튿날 새벽부터 재개된 전투에서 방어선이 뚫리자 윤흥신과 병사들은 퇴각하는 것처럼 위장해 왜군을 성안으로 유인한 뒤 기습했지만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윤흥신은 선조 때 선무원종공신의 일등공신이 됐다. 하지만 동래 충렬사 제사에서 윤흥신의 위패는 빠졌다. 임란 이후 180여년이 지난 영조 48년(1772년 1월14일) 조선통신사 사절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조엄의 노력으로 충렬사 제단에 윤흥신의 위패가 올라갈 수 있었다. 경상감사를 맡은 조엄이 윤흥신의 전투와 관련된 공적과 자료를 찾아 조정에 올린 덕분이었다. 윤흥신은 부산진성 정발, 동래성 송상현과 함께 부산의 임진왜란 3대 명장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부산 동구는 최근, 6억원을 들여 동구 초량동(1143-1) 광장의 윤흥신 석상을 동상으로 재건립했다. 석상은 지난 1981년 세워졌는데, 빗물 등이 스며들어 석상 내부 철골 구조물에서 녹물 등이 흘러내리는 등 유지보수 문제가 불거져서다. 윤흥신 동상은 왼손에는 활을 들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고 서 있는 모습이다. 좌대 7m를 포함한 동상 높이는 11.4m다.

김영동 기자 yd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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