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초월한 명작 ‘레미제라블’에도 구멍은 있었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시대를 초월한 명작의 가치 입증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레미제라블’을 이해하기 위해선 제목을 생각해야 합니다. 도둑이나 범죄자를 ‘미제라블’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미저리(궁핍)’가 ‘미제라블’한 짓을 범하게 한다는 메시지예요.” (뮤지컬 ‘레미제라블’ 작가 알랭 부블리)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의 징역을 살고 나온 장발장, 미혼모라는 사실이 발각돼 공장에서 쫓겨났고, 딸의 약값을 벌기 위해 거리의 여자가 된 판틴, 부조리한 시대에 정의를 외치는 청년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쓴 소설 ‘레미제라블’은 ‘궁핍한 사람들’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무대로 가져온 뮤지컬은 1985년 초연 이후 53개국에서 22개 언어로 막을 올렸다. 원작 소설을 토대로 알랭 부블리가 극본을 맡았고, 미셸 쇤베르그가 음악을, 캐머런 매킨토시가 프로듀서로 작품을 진두지휘했다. 한국어 공연은 8년 만이다.
‘레미제라블’(3월 10일까지·블루스퀘어)은 17년의 시간을 담아낸 방대한 서사를 세 개의 시대로 구성, 이야기를 간결하고 집중력 있게 구성했다. 이 무대를 보고 있자면, 시대를 초월한 ‘고전의 가치’를 절감하게 된다.
무대는 1815년. 죄수번호 24601로 불리며 가슴에 낙인을 찍은 장발장이 복역을 마치고 세상에 나와 분노와 원한을 딛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자칫 늘어질 수 있는 방대한 스토리는 의외로 숏폼 시대에도 걸맞는다. 세 시대를 압축해 보여주자, 뮤지컬은 인터미션을 포함해 총 180분간 이어지는 데도 지루할 틈이 없다. 세 시대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 시대를 관통하는 인물들의 개성이 뚜렷하다. ‘레미제라블’은 장발장이라는 한 사람의 생애와 그가 살아가는 시대, 그 시대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얽힌 작품이다.
프롤로그 격에 해당하는 첫 시대(1815년)의 주인공은 장발장이다. 범죄자라는 주홍글씨로 인해 출소 이후에도 편견과 차별을 안고 사는 장발장과 그에게 포용과 사랑으로 변화의 씨앗을 뿌려주는 주교 미리엘이 첫 시대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두 번째 시대인 1823년엔 ‘개과천선’해 공장장이자 시장이 된 장발장의 공장에서 일하던 판틴의 이야기가 흐르고, 세 번째 시대(1832년)에선 성장한 코제트와 프랑스의 혁명가들, 죄수 시절부터의 악연이 이어온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뮤지컬은 모든 면에서 명작의 아우라를 보여준다. 임팩트있게 추려낸 정의와 사랑의 스토리, 그 시대 안에서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는 개성 강한 인물들, 이들의 삶과 시대를 연결하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 독창적인 단조로움으로 꾸민 무대가 대단한 명작들을 만드는 요소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는 특히나 훌륭하다. 최재림 민우혁의 장발장, 조정은의 판틴, 카이 김우형의 자베르, 김성식의 앙졸라, 김수하의 에포닌, 아역 배우들이 그렇다.
‘오페라의 유령’에 이어 ‘레미제라블’까지 겹치기로 무대에 오른 최재림은 명실상부 ‘가장 바쁜 뮤지컬 배우’의 저력을 보여준다. 매 작품 새로운 연기를 입어온 그는 이번에도 완벽한 장발장이었다. 고된 일정과 코로나19로 고음 파트에선 몇 번의 음 이탈이 있었으나, 사실 그 정도의 흠을 뛰어넘을 만큼 최재림이 쌓아온 장발장의 연기와 넘버(뮤지컬 노래)가 훌륭하다. 특히 노래마다 감정과 서사를 담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초연부터 지금까지 세 번의 한국어 공연에서 판틴을 도맡고 있는 조정은은 섬세하다. 모든 것을 잃었고, 세상에 버림받은 때에도 딸을 지켜내려 견디는 판틴이 죽기 직전 부르는 ‘판틴의 죽음’은 압권이다.
2012년엔 앙졸라를, 2015년엔 자베르를 맡았던 김우형은 법이라는 미명 하에 편협한 시각으로 세상을 쥔 관료를 연기하면서도, 극의 말미 자신 안에 잘못 정의한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인간적인 고뇌까지 드러낸다. 청년 혁명군 앙졸라를 연기한 김성식은 시대를 바꾸기 위한 청년의 열망을 시원시원한 창법과 매끄러운 연기로 보여주고, ‘혁명의 시대’에 사랑에 아파하다 시대에 투신한 에포닌을 김수하는 찰떡같이 소화했다. 특히 흔들림 없는 가창력, 탄탄한 연기, 안무에서 몸을 쓰는 자연스러움은 김수하의 최장점이다.
무대 연출도 인상적이다. 거대한 시대는 상징적인 구조물로 보여주되, 인물의 내면과 스토리를 연결하는 모습은 삽화로 보여준다. 맷 킨리 무대 디자이너는 “많은 장면들은 비토르 위고의 그임과 데생을 혼합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며 “19세기 프랑스 사진들을 조합해 배치하거나 기반으로 삼기도 하고, 추상적인 작품과 풍경화에 기초를 두고 그가 채색한 천들을 조합해 제작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삽화들이 방대한 시대에 서정성을 불어넣으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준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해 불렸던 넘버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군데군데 거슬렸다.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는 관악기가 ‘레미제라블’의 포문을 여는 순간부터 먼 자리 객석의 귀에는 조화롭지 않은 소리들이 들려왔다. 정돈되지 않은 관악 파트만이 도드라져 음악의 감동을 반감시켰다.
‘레미제라블’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불운한 시대를 바로잡고 내일로 향할 수 있다는 희망, 시궁창에서도 별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이 투영된 상징적 인물은 판틴의 딸인 코제트다. 장발장이 판틴과 약속해 코제트를 지켜내고, 그에게 헌신하는 것은 그가 곧 시대의 희망이자, 내일이기 때문이다. 코제트가 온전해야 비참한 삶에 혁명이 시작된다. 때문에 코제트는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성역의 존재이다. 그만큰 그의 연기와 노래 역시 중요하다. 이번 한국어 공연의 코제트(류인아)는 이 대단한 무대의 구멍이다. 이 작품이 만약 TV드라마였다면, 어린 코제트와 성인 코제트의 변화를두고 엄청난 논란이 따라왔을 것으로 보인다. 성인 코제트의 다소 과장된 대사, 감정이 담기지 않은 노래, 고음으로 끝맺는 순간까지 온전히 마무리되지 않는 코제트의 노래와 연기에선 내일의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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