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넘게 집권’한 이 정당…‘패거리 정치’끝낸 다더니 ‘말짱 도루묵’인 이유 [한중일 톺아보기]
◆ 제22대 국회의원선거 ◆
그도 그럴것이, 이번 스캔들에 대응해 당 수뇌부가 고심끝에 내놨다는 쇄신안이 일본 국민들에게 개혁 의지를 전혀 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쇄신안은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와 벌칙 강화가 골자로, 파벌에 대해 ‘자금 모집’과 ‘인사 추천’ 기능을 배제하면서 단순한 ‘정책 집단’으로의 존속은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교도통신 등 현지 매체들이 이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본 국민 80~90%는 해당 쇄신안에 대해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는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하락세 였던 기시다 내각 지지율은 이 스캔들에 말그대로 ‘날개없이 추락’ 하고 말았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파벌 해산’ 이라는 초강수를 두면서 반전을 노렸지만 당내 모든 파벌의 해체로까지 이어지진 못했고, 바닥까지 떨어진 지지율은 최근까지도 20%대를 면치 못하며 ‘정권 퇴진’ 수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1945년 패전후 보수 본류 자유당과 보수 방류 민주당 두 세력으로 나뉘었던 일본의 보수 진영은 1955년 ‘보수 합동’으로 지금의 보수 빅텐트 성격의 자민당을 창당했습니다. 이후 정치 신조, 정책, 경력 등에서 가까운 의원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임이 생긴 것이 바로 파벌의 뿌리입니다.
이듬해 총재선거를 계기로 당내 ‘8개 군단’이라 불리는 8개 파벌이 처음 들어섰고, 이들은 1970년대 들어 다시 5명의 실력자를 리더로 하는 5개 파벌로 재편됐습니다. 이들 5개 파벌-(후쿠다파·다나카파·오히라파·나카소네파·미키파)을 이끌던 인물들은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모두 자민당 총재직을 맡으면서 한 차례씩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무렵 파벌과 관련된 대형 권력형 비리 스캔들이 처음 터집니다. 일명 ‘록히드 사건’으로, 당시 현직 총리였던 다나카 카쿠에이가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나카 총리는 비리 스캔들에 대한 책임으로 자민당을 불명예 탈당한 상태였음에도, 막후에서 파벌을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차기 총재 선임까지 좌지우지할 정도여서, 이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바로 ‘어둠의 쇼군’ 이었죠.
1980년대 스즈키 젠코 내각때 들어와 5대 파벌을 모두 참여시키는 체제가 구축되면서, 파벌 간 항쟁은 이전보다 다소 누그러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1988년 또 다시 큰 풍파가 닥칩니다. 이번엔 다케시타 노보루 당시 총리와 직전 총리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등 총 76명의 정치인들이 뇌물성 주식을 양도받은 ‘리크루트 사건’이 자민당을 뒤흔들게 됩니다. 4년 뒤인 1992년에는 일본 택배업체 ‘사가와 큐빈’이 정부의 각종 인허가를 목적으로 헤이세이연구회(현 모테기파)실력자 가네마루 신 의원에게 거액을 건넨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기도 했습니다.
즉, 이전에도 이미 최소 2차례 이상 파벌 비자금 관련 유사한 사건이 당내에서 벌어졌던 겁니다.
2000년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재임 당시 ‘파벌 해체론’이 또 강하게 일어난 데 이어, 2009년 총선에서 다시 한차례 참패하면서 자민당에서 파벌정치의 색체가 옅어졌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파벌은 2012년 총선 대승 이후 다시 당내에서 확고히 자리잡아왔습니다.
이에 요미우리 신문 등 일본 유력 언론들은 최근 기시다 총리가 스스로 총대를 메고 자신이 속했던 파벌을 해산하는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오는 9월 점쳐지는 당 총재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서는 좋든 싫든 결국 파벌 인맥에 의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전통우방 미국과 동맹 관계를 끌어올렸고, 일본으로서는 손해보는 일 없이 껄끄러웠던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성공했습니다. 지난해 G7 정상회의 당시 의장으로서의 역할도 잘 수행해 나름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굵직굵직한 외교 일정이 예정돼 있는데, 일단 오는 4월 일본 총리로서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이후 9년만에 미국 국빈 방문이 잡혀 있습니다. 방미 기간 미 의회 연설도 있을 예정이라,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내각 지지율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됩니다.
내달 서울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3월 20~21일 양일간 서울 고척돔에서 LA다저스와 샌디에이고 파드레스와의 MLB 개막전이 열리는데, 기시다 총리가 깜짝 등장해 시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죠.
아시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파벌 ‘고치카이(宏池会)’ 출신 답게, 중국과의 관계개선도 그의 주요 목표 중 하나 입니다. 지난해 11월 APEC 정상회의때 시진핑 주석과의 양자 회담을 성사시켰던 그는 올해 한중일 정상회담에 이어 중일 정상회담 성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 등을 위해선 아무래도 정상간 만남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지난 9일에도 그는 중의원 예산위에서 북일 정상회담 관련 “대담하게 현상을 바꿔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며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움직여 정상끼리 관계를 구축할 것이고, 구체적으로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만에 하나 올해 납북 피해자 문제에 진전이 있게 되거나, 22년만에 북일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지지율 상승은 물론 일본 총리로서는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게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기시다 총리는 지금의 낮은 지지율을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 최대한 끌어올린 뒤, 가급적 9월 이전에 중의원을 해산함으로써 총리직 연장을 노릴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자민당은 기본적으로 보수 정당입니다. 하지만 당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어서 사실상 ‘정당 내 정당’ 역할을 했던 파벌들이 다양한 의견과 정책 논쟁을 통해 경쟁, 위기때마다 유사정권 교체를 이뤄왔습니다. 여러 파벌의 존재가 유권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장기 집권의 발판이 됐던 겁니다.
예컨데, 1960년대 들어 자민당에서 가장 오른쪽 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다음으로 총리직을 맡았던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당시 당내에서 가장 리버럴한 성향이었습니다. 개헌과 재무장을 주장하는 매파가 독주할 수 없었던 배경에는 리버럴파들의 견제도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파벌간 경쟁이 사라지고 당내 혁신과 역동성이 떨어지면서 끼리끼리 나눠먹는데만 안주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진창수 교수는 “파벌들이 새 정책을 내놓고 새 인물이 나와 활기를 일으켜야 되는데, 영수들부터가 노회한 사람들만 계속 나오니 일본 국민들이 볼 때 국민은 안중에도 없구나 생각하게 됐다” 며 “이번 비자금 사건도 관성적 파벌논리로만 정치를 하다보니 생긴 것” 이라고 짚었습니다.
이원덕 국민대 일본연구소장은 “단기적으로 여론이 너무 안좋으니 바싹 엎드리는 포즈를 취한 것 정도”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자민당 파벌은 재생할 가능성이 크고, 이번 사태로 일본 정치에 큰 변화가 있기 보단 그저 ‘찻잔속 태풍’ 정도로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이원덕 교수는 “일본 정치 특성상 총리가 바뀔순 있어도, 지지기반이 흔들려서 자민당이 정권을 잃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야당들이 워낙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조진구 교수는 “야당이 이번 스캔들 관련 자민당을 비판만 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어떻게 새로운 정치를 해 나갈것인지 제시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래야 야당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암담한 일본 정치의 현실을 두고 일각에선 사실상 ‘유권자들에 의한 일당독재’ 아니냐는 냉소적 비판도 나옵니다.
하지만 한국의 현재 정치 상황도 일본 보다 별로 나을게 없어보인다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입니다.
진창수 교수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진영논리를 꼽았습니다. 정책이나 사안별 논의는 없고 그저 모든게 진영논리로 귀결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는 “일본은 정책이 맞냐 안맞냐를 놓고 논쟁을 하지 적어도 진영논리는 없다”며 “과거엔 정책관련 일본 국민들에게 선택의 폭 이란게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서 문제다. 그렇지만 한국처럼 진영논리가 팽배하진 않다”고 꼬집었습니다.
진교수는 현재 심각한 위기상태에 놓인 일본 보수세력과 관련, 한국의 보수세력에 대한 조언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국 보수당은 과거 자민당이 유사정권교체가 가능했을 때처럼 당내 쇄신이 필요하다. 국민들, 특히 중도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새 정책을 적극적으로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짚었습니다.
조희용 전 국립외교원 일본연구센터장도 말을 보탰습니다. 그는 “일본정치는 지도자가 나서서 대중에게 이야기도 많이 하고 그런 과정에서 공개성 내지 개방성을 갖는 측면이 있는데, 현재 한국은 인적요소만 너무 커진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또한 “대통령제인 한국과 내각제인 일본정치를 단순 비교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렵다” 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민심을 민감하게 읽어내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아무것도 안된다는 건 어느나라든 진리” 라고 강조했습니다.
일본은 정치 제도, 지형, 국민성향 등 많은 부분이 한국과 다릅니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자민당 스캔들로 드러난 일본 정치의 암담한 상황이 때마침 총선이 얼마 안남은 한국 정치를 한번 비춰보는 거울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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