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영토 확 넓힌 ‘이것’…한국인들 고단한 영혼도 달래주었다 [역사를 바꾼 사물들]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른다. 강희제(1661~1722)부터 옹정제(1722~1735)를 거쳐 건륭제(1735~1795)까지 3대 황제가 다스리던 130여년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강건성세기에 청제국은 활발한 정복사업을 펼쳐 건륭제 때 오늘의 중국 영토를 확정했다. 사실 청제국 이전 중원을 지배하던 왕조들도 정복 활동을 통해 서역으로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구적인 지배로 이어지지 못하고 단기적인 점령에 그치고 말았다.
반면 청제국이 정복한 영토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강건성세가 지나 청제국이 쇠약해지고 무너지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다시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섰어도 ‘하나의 중국’ 안에 묶여 있었다. 강건성세 이후 이 땅들이 ‘중국’이라는 틀 안에 묶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인구압력’이다. 강건성제 이전의 정복 활동은 대부분 정복 후 군대의 점령 정도에만 그쳤지만 강건성세기 중원지역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해 인구 압력이 발생했고 이 압력은 변방으로의 이주를 가속화시켰다. 이로 인해 변경 지역 거주자들도 중국 문화와 동질성을 느끼게 됐고 이런 문화적 정체성이 제국의 구심력으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구압력은 무엇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1595~1596년 사이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험악한 날씨 때문에 계절이 변해서 붉은 장미의 봉오리가 터지면서 서리가 내리는가 하면, 긴 겨울 살얼음 위로 비웃기나 하듯이 향기로운 여름 들꽃이 피면서 봄, 여름, 오곡의 가을, 엄동설한의 특징들이 마구 바뀌고 있다니까. 과일이나 채소로는 계절을 알 수 없게 됐어요.”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그대로 나타나 있다. 1600년대 후반 영국의 화가인 토머스 와이크가 그린 ‘템스 강의 빙상시장’이라는 그림에는 당시의 런던 풍경이 묘사돼 있다.
이런 사회적 혼란은 희생양을 만들어 냈다. 자연 재앙과 대기근의 원인을 ‘마녀’에게 돌려 유럽 사회에 마녀사냥이 횡행했다.
1580~1620년의 40년 동안 스위스 베른에서만 1000명 가량의 여성이 마녀 혐의로 처형됐다. 프랑스 로렌과 트레브 지역에서도 1581~1595년에 2700명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독일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메스펠브루니도 1616~1617년에 300명 넘게 화형 시켰다. 유럽에서 이 시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 역시 이런 혼란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소빙하기는 아시아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27년 중국에서 이상 기온에 의한 대기근이 발생하고 역병이 창궐한다. 이로 인해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했는데 이런 반란 세력을 규합해 1644년 이자성이 만리장성을 넘어왔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왕조 교체 역시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조선에도 기근이 만연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현종 때의 경신대기근(1670∼1671)이었다. 6월까지 서리가 내렸고 9월에 다시 서리가 내렸다. 이상저온으로 인한 냉해 때문에 보리, 밀, 조, 기장의 작황은 말 그대로 최악이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조선 전체 인구의 11∼14%에 해당하는 약 14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소빙기 동안 자주 기근이 발생했다. 그 중 간에이 대기근(1642년~1643년), 교호 대기근(1732년), 덴메이 대기근(1782년~1787년), 덴포 대기근(1833년~1839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텐메이 대기근이 가장 심했는데 기아·역병으로 약 92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감자와 고구마는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생물학적으로 뿌리줄기식물이라는 점이 같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만 자라던 식물이어서 신대륙 발견 이후에야 구대륙에 전해졌다는 점도 같다. 구대륙에 전해진 뒤 구황작물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하지만 두 작물이 전해지고 수용되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감자는 유럽인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아 전파 시기가 늦어졌지만 고구마는 신대륙 발견과 함께 바로 수용됐다.
스페인 사람들은 1570년경이 되어서야 고국에 감자를 처음 소개했다. 안데스 지역에서 감자를 처음 목격한 후 30년이 지난 뒤였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감자는 가난한 자들이나 먹는 음식에 불과했다. 감자는 별다른 흥미도 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터부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마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유럽에서가 아니라 아시아에서였다. 고구마는 아시아인들에게 구원이 됐다.
마닐라에서 진진룡의 눈에 들어온 식물이 고구마였다. 스페인인들이 이 작물을 필리핀으로 가져왔고 말레이족들이 이를 받아들여 재배를 했는데 우연히 달콤한 고구마를 맛본 진진룡은 이를 중국으로 가져가기로 결심했다. 더구나 고구마는 1무(畝)에서 최고 2000kg 정도 생산이 가능할 정도로 생산성이 높아서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명나라의 전답 1무(畝)에서는 겨우 100~150kg의 쌀이 생산되는 정도였다.
문제는 당시 고구마가 반출 금지 품목이었다는 것이다. 진진룡은 고구마 넝쿨을 밧줄처럼 둘둘 만 뒤 바구니에 넣어 밀수했다. 중국판 문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진룡은 고구마 줄기를 키워 이를 주변에 선물하는 정도에 그쳤는데 그의 아들 진경륜(陳經綸)이 복건 순무(巡撫) 금학증(金學曾)에게 글을 올려 고구마에 대하여 소개하며, 시험 재배를 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당시 복건은 인구는 증가했지만 농사 지을 땅이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 큰 가뭄이 들어 수확할 곡식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복건 순무 금학증은 무엇이든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험 재배할 땅을 진진룡 부자에게 제공했다. 곧장 실험재배가 진행됐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구마 생산에 고무된 금학증은, 진진룡의 방식에 따라 복건 모든 지역에서 고구마를 재배하라고 지시하였고, 자신도 고구마에 대한 연구서 ‘금서전습략(金薯傳習略)’이라는 책을 썼다. 이후, 복건 지역의 기근 문제는 완화되었으며, 복건 지역에는 금학증과 진진룡을 모시는 사당까지 세워졌다.
고구마는 복건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당시가 명나라와 청나라의 왕조 교체기로 중원 지역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이다.
소수 민족인 만주족의 청은 중원을 차지한 후 적극적인 서진정책을 폈다. 만주족 통치자들은 새롭게 얻게 된 영토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 제국의 생존과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청 왕조는 티벳족, 요족, 위구르족 등이 거주하던 소수민족 자치구를 강제로 통합했고 사람들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땅을 싸게 나누어주었고 조세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동부에서 서부 산악지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들이 받은 땅은 쌀과 밀을 키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중앙정부는 쌀이나 밀 대신 고구마, 옥수수 같은 새로운 작물의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유했고 이것들이 이주민의 정착에 큰 도움이 됐다.
고구마는 “한 무(畝)의 땅에서 수십 석(石)이 생산되어 모든 곡식의 20배에 달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만력제(1572-1620) 시절 1억명이었던 중국의 인구는 불과 170여년만인 1794년 청나라 건륭제 59년(1794년) 3억1300만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대기근을 겪는 와중에서도 인구가 급속하게 늘어난 것이다. 고구마를 비롯해 새롭게 들어온 작물의 영향이 컸다.
역사학자 피터 프랭코판은 ‘기후변화 세계사’에서 “처음 중국 남부에서 시작돼 북쪽으로 확산된 고구마 도입은 농민 반란을 줄이는 데 이바지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청나라가 넓어진 영토에도 불구하고 왕조의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고구마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은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와 교류를 하고 있었지만 고구마는 다른 루트를 통해서 전해졌다.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인 류큐(琉球) 왕국 시절 명나라에 갔던 조공선 책임자가 돌아오는 길에 푸젠성에서 고구마 종자를 얻어다 심었고 이를 들여다 일본 본토인 사쓰마에서는 1705년에 처음 고구마를 심었다.
당시 막부체제였던 일본의 특성상 사쓰마번은 고구마를 전략물자로 여겨 다른 지역으로의 반출을 금지했다. 하지만 1711년 전국의 절을 순례하던 아사미기초로라는 승려가 고구마의 가치를 간파하고 “여러 사람을 위한 일이라면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쯤은 두렵지 않다”며 고향에 보급하는데 성공했다. 1732년 교호대기근이 일본 열도를 할퀴었는데 고구마를 재배하는 지역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
고구마의 유용성을 확인한 쇼군이 사쓰마에서 모종을 가져다 지금의 도쿄에 심으면서 고구마가 일본 전체로 퍼졌다.
고구마라는 말은 쓰시마에서 고구마를 부르던 이름에서 기원했다. 쓰시마에서는 고구마를 효자마(孝子麻)의 일본어 발음대로 ‘고우시마(こうしま)’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변해서 고구마가 된 것이다. 효자마(孝子麻)에는 기근이 들었을 때 효자가 고구마를 심어 늙은 부모를 봉양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영향이 있다. 일본은 발효주에는 보통 酒를 사용하지만 농축소주를 의미하는 본격소주는 ‘本格燒酎’라고 하는 등 酎를 사용한다.
일본은 1895년 주정 생산을 시작하고 1899년 희석식 소주를 발병하는데 일제강점기인 이 희석식 소주가 한반도에 들어온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안동소주 같은 우리나라 전통주가 아니라 일본의 희석식 소주인 것이다.
조선통감부가 1909년 주세법을 발표하고 1910년부터 주정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때 주정의 원료로 사용한 것이 바로 고구마였다.
그러자 1916년 조선총독부는 허가를 받은 업체에서 제조하는 술 외에는 세금을 대폭 인상하고 밀주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일본은 주정 생산을 위해서 제주도 지역에 고구마 심기를 대대적으로 장려했다. ‘제주도편람’에 따르면 제주도의 고구마 재배면적이 1913년 600정보에서 1930년 3699정보로 6배 이상 늘어났다. 이렇게 생산한 고구마를 전량 수매해 제주도에 있던 주정공장에서 주정으로 만들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일제는 고구마 심기를 더욱 장려했다. 이로 인해 고구마 재배면적이 1938년에는 7357정보로 늘어났다. 1938년 1월 13일 매일신보는 제주도에 주정공장 신설을 결정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1939년 2월 대정면에 주정공장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주용 주정이 아니었다. 전쟁에 사용할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이었다. 요즘 표현으로는 바이오디젤 공장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의 패망 후 이런 주정 공장들은 다시 희석식 소주용 주정공장으로 전환했고, 소주가 서민들의 삶 속에 더욱 파고드는 계기가 됐다.
소주 주정을 위해서 정부의 고구마 수매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고구마를 그냥 수매하는 것이 아니라 얇게 잘라서 말린 형태의 고구마를 수매했다. 이것을 경상도 지역에서는 빼떼기라고 부르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주로 빼깽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값싼 주정용 타피오카 전분이 수입되면서 대부분의 소주 업체들이 고구마 대신 타피오카를 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해 고구마를 사용한 주정은 거의 사라졌다.
어쨌든 고구마는 희석식 소주가 한국인의 삶 속에 자리잡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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