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OBS' 이훈기, 왜 정치를 결심했을까?
[인터뷰 (1)] 이훈기 전 OBS경인TV 기자, 더불어민주당 13호 영입인재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수많은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향했고 향하고 있다. 극단적으로는 언론사 회의를 오전에 참석하고 그날 오후 정치권으로 간 사람이 있었고, 그외 많은 언론인이 최소한의 유예기간조차 두지 않아 현직 언론인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언론보도를 정치권으로 가는 디딤돌로 이용했거나 인지도나 영향력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활용했다면 언론 신뢰를 깎는데 일조했으니 폴리널리스트란 비판을 받을 만하다.
언론인 정치권행이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이 언론 관련 입법활동에서 개혁적인 성과를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부 의원들은 말과 글로 '공격수' 역할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사회적 자본을 깎아먹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이때 시민들은 언론계와 정치권에 모두 실망한다. 언론인도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고, 전문성을 살려 입법활동과 행정부 견제에 기여하겠다는 말이 원론적으로 맞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공허하게 맴도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2일 OBS경인TV 전직 기자 이훈기를 열세번째 인재로 영입했다. 지난 2020년 9월 OBS를 떠났고 지난해 10월까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대외협력담당관으로 일했으니 폴리널리스트 논란에선 다소 빗겨나 있다. 무엇보다 그가 유명 방송사에서 꽃길을 걸었거나 정치권에 우호적인 기사를 쓰면서 인맥을 쌓은 인사가 아니라서다. 기자보다는 민영방송 사유화에 맞선 노조위원장이 더 어울리는 쪽이다.
방송계에서 처음으로 방송사(iTV)가 재허가를 받지 못하는 결정을 구성원들이 받아들여 회사가 사라졌다. 3년간 실업자 생활을 버틴 200여명 조합원이 자비를 털어 새 방송사(OBS)를 만드는 과정 내내 그는 노조위원장을 맡았다. 새 직장에서 다시 대주주 사유화에 맞섰다. 방송정책을 담당해 회사 숙원사업(IPTV와 재송신료 협상)을 해결했지만 돌아온 건 좌천성 인사(지역총국 발령)였다. 1991년 인천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30여년 지역언론 활동을 아쉽게 마무리했다.
이훈기는 지역언론인 집안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이종윤은 일본에서 인쇄술을 배워와서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인천 지역언론의 효시인 대중일보 창간 주역이고, 아버지 이벽은 대중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1973년 언론통폐합 당시 경기일보 편집국장에서 해직됐다. 그의 형은 윤석열 대통령 이름으로 포상을 받지 않겠다고 해 언론에 알려졌던 이철기 동국대 교수다. 이훈기의 배우자도 언론인(PD)이다.
민주당은 '언론자유 상징'으로 이훈기를 영입하면서 “행동하는 언론인”이라고 칭했다. 그는 '반골'기질이 있는 지사(志士)적 언론인 집안의 명예를 걸고 현 정부 언론장악에 맞서겠다며 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때마침 현직 의원 비위로 당에서 전략공천 지역구로 지정한 인천 남동을이 현재 그가 사는 곳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정치인 이훈기에게 요청한 첫 인터뷰는 언론인 이훈기의 마지막 인터뷰로 마무리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왜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나?
“언론 상황이 엄중하다. 공영방송 KBS는 정권이 장악했고 MBC도 위태롭고 YTN은 민영화 기로에 섰다. 기자들은 조금만 뭘 해도 고소·고발·압수수색으로 위축돼 있다. 다들 비슷하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누구도 묶어내지 못하고 있다. 언론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파편화됐다. 이부영 이사장(자유언론실천재단)부터 현업 언론인까지 쭉 있는데 내(58세)가 허리 정도 된다. 중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충고도 있어 여러 고민을 하다가 정치권에 가면 입법과 함께 소통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이미지, 소신을 지켜온 모습 때문에 여의도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을 것 같다.
“그런 이야기도 있었다. iTV 폐업부터 OBS 창간 등 극한 상황에서 목표를 위해 무엇이든 해왔던 경험, 기자로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 젊은 언론인들은 현 상황에 비판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비빌 언덕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바람막이가 돼 여러 세대를 묶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배우자도 정치권으로 가는 걸 걱정했을 것 같다.
“처음에는 잠도 못 자더라. 정치가 쉬운 길이 아니고 가족들도 힘드니까.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도 아니라 고민을 한 것 같다. 목표를 세우면 끝까지 가는 스타일이라, 이제는 힘을 실어준다.”
-현직 기자 입장에서 하나 묻고 싶다. 언론인이 정치권에 직행해 비판받는 것과 별개로, 제2의 직업으로서 정치권에 가는 일이다. 꽤 많은 전직 언론인이 정치권으로 간다. '언론인의 미래가 결국 정치인인가'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언론인으로 커리어를 마무리하기 어려운가?
“여러 고민 지점이 있다. 다만 정치에는 언론 분야도 있다. 언론 분야의 정치는 누가 할 것인가. 언론인 출신이나 언론학자 정도가 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누가 잘 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아버지(이벽)가 1973년 경기일보에서 강제해직 당했다. 당시 경인 지역신문이 3군데(경기매일신문, 연합신문, 경기일보)였는데 사주들을 중앙정보부에 끌고가 지장 찍게 해 하나로 통폐합(경기신문)했다. 당시 편집국장이던 아버지는 고문받고 나와 평생을 해직자, 실업자로 살았다. 정치할 기회도 있었던 거 같은데 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다. 평생 언론인의 지조를 지키면서 2000년 돌아가실 때까지 꽤 힘들게 살았는데, 좀 안타까웠다. 언론인의 제2의 인생은 뭐다, 이렇게 정립된 건 없어서 더 어렵다. 뭐가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노조위원장을 총 6번(3·6·7·8·9·15기)이나 했다.
“iTV가 없어지고 방송 못한 기간이 3년이다. 당시 노조위원장 임기가 1년이라서 3번 했던 게 포함됐다. 조합원 200명에 가족까지 하면 거의 1000명이니 정말 큰 일이었다. 그 어려운 상황에 다른 사람이 맡을 수도 없었다. 우리끼리 뭘 할까 고민하다가 그때는 정식노조도 아니었고 해서 노조 명을 '희망조합'으로 정했다. 보통 노조를 'KBS본부', 'iTV지부' 이렇게 부르지 않나. OBS노조는 지금도 OBS희망조합지부라고 한다.
-2004년 12월말 iTV 폐업 당시 노조위원장이었으니 정파된 3년간도 계속 위원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발단은 iTV 회장이 iTV를 차기 인천시장 선거에 활용하기 위한 내용을 담은 문건을 발견하면서다. 문건에는 iTV에 견학 온 학생들을 잠재적 유권자로 만들고 그 부모들이 회장을 지지하게 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회장에게 물어보니 기획사에서 건네줬다고 해서 기획사에 물어보니 회장이 요청해서 만들었다고 하더라.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iTV 메인뉴스용 1분54초짜리 리포트를 만들었다. 회장은 도망다니며 반론도 주지 않고, 회사에선 보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라 오후부터 긴장감이 돌았다. 구성원들은 부조정실 점거해서라도 뉴스 내보내겠다고 했고 결국 리포트가 나갔다. 방송이 사유화되면 어떤 일까지 하는지 보여준 사례이자 언론자유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민영방송사 회장을 메인뉴스에 고발한 일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다. 회장은 이후 이사회에서 불신임받아 회사를 떠났다.”
-그런데 왜 방송위원회(현 방송통신위원회)가 재허가를 하지 않는 일까지 벌어졌나?
“회장이 나간 뒤에도 대주주와 싸움이 있었다. 이번엔 iTV를 지렛대로 막대한 부를 얻으려 했다. 대주주가 화학회사였는데 엄청난 양의 폐석회를 매립하려면 톤당 얼마씩 비용을 내야하는데 iTV 유수지에 매립하고 그 땅을 용도변경하면서 수조원의 개발이익을 챙겼다. 우리 노조는 '공익적 민영방송'을 주장했는데 방송사로 부를 창출했으면 사회에 환원하고 iTV에도 환원하라고 요구했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같은 공익재단을 만들고 대주주는 방송에서 손을 떼라는 내용이다. 2004년 11월경 전면파업을 했는데 12월12일 회사에 용역깡패 300명이 와서 장악하고 직장을 폐쇄했다. 직장폐쇄한 방송사도 처음일 거다. 내 인생에서 가장 눈물 나는 날이다. 그렇게 쫓겨나고 결심했다. 실업자가 돼도 재허가를 안 받는 게 낫겠다. 성유보 선생이 재허가추천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우리가 '저런 대주주와 방송 못 만들겠다. 우리는 다리를 불살랐다'라고 했더니 거기서도 난리가 나서 '평생 실업자로 살지 모른다'며 걱정하더라. 우리가 새 방송을 만들테니 (재허가) 취소해달라고 했다. 2004년 12월31일 모두 실업자가 됐다.”
-당시 노조위원장으로서 부담이 컸을 것 같다.
“2004년에 퇴직금도 계좌압류 등을 거쳐 어렵게 받았다. 퇴직금에서 20%씩 내서 20억 원으로 새 방송 만드는 기금을 만들었다. 사무실 얻어 50명이 월 80만 원씩 받으며 기획·홍보 파트로 나눠 새 방송을 준비했다. 나머지는 세차장, 급식배달, 대리운전 일하며 버텼고, 캐스트들은 케이블TV 가서 일해 월급 받으면 노조에 기금으로 내면서 3년을 지냈다. 400여개 시민단체가 우리(노조)와 발기인 1만5000명이 30억 원을 모았다. 한겨레 발기(3342명)보다 많은 인원이다.”
-3년을 버틴 끝에 2007년 12월말, OBS로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방송사가 없어지고 그 구성원들이 다시 새 방송사를 만든 일이 처음이었다.
“2004년 이전까지 방송 재허가 제도는 유명무실, 서류만 내면 통과였다. 그러나 우리(iTV노조)의 희생이 담긴 집단실험으로 재허가 제도 실효성이 생겼다. iTV때 방송이 갑자기 중단되면 생기는 (시청권·일자리) 문제 때문에 20대 국회에서 추혜선 의원이 재허가가 거부되더라도 (12개월간) 방송을 유지하고 고용승계하는 방송법 개정안을 만들기도 했다.”
-자진폐업이지만 경기방송 언론인들도 약 3년 만인 지난 2023년 3월 OBS 라디오로 개국했는데, 비슷한 사례다.
“당시 (방송정책국장을 마치고) 의정부총국으로 쫓겨나 있을 때였는데, 그분(전 경기방송 언론인)들이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다. 우리 사례로 새 방송의 희망과 가능성을 본 게 아닐까.”
인터뷰는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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