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걸고 폭탄 던진 일본인…49년 만에 자수하고 숨지며 한 말

김소연 기자 2024. 2. 1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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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전범 기업 ‘폭탄 테러리스트’의 삶과 죽음
일본 도쿄 경찰서 앞에 붙어 있는 기리시마 사토시 수배 전단. 도쿄/EPA 연합뉴스
“마지막은 기리시마 사토시로 죽고 싶습니다.”

1970년대 ‘폭탄 테러’라는 일본 급진 무장투쟁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동아시아 반일무장전선’(무장전선)의 조직원 기리시마는 수배 생활 49년 만에 자수를 선택했다. 위암으로 죽음을 불과 나흘 앞둔 시점이었다. 사건 당시 21살 대학생이던 기리시마는 ‘우치다 히로시’라는 가명으로 반세기에 걸친 도피 생활을 견뎌내는 동안 70살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의 한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지난달 25일 병원 관계자에게 자신이 ‘기리시마 사토시’라는 사실을 알리며 경찰에 신고하라고 부탁했다. 자수의 이유는 가명이 아닌 진짜 자기 이름으로 죽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치다라는 가명을 벗어던진 기리시마는 지난달 29일 숨을 거뒀다. 일본 경시청 공안부는 그가 사망하기 직전 의사가 입회한 가운데 짧게나마 조사를 진행했다. 기리시마는 이 자리에서 “(1970년대 저지른) 사건에 대해 후회한다”, “다른 조직원과 일절 연락하지 않고 계속 혼자 살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경시청은 정확한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기리시마의 디엔에이(DNA)를 복수의 친척과 비교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데 모순은 없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보다 확실한 물증을 얻기 위해 지난 2일 기리시마가 살던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 집을 수색해 노트 1권, 증명사진, 지갑, 월급 명세서 등을 확보했다. 그의 집에선 반 세기전 무장전선과 관련된 물품이 나오진 않았다.

기리시마는 49년 전 ‘일본제국주의 반대’를 걸고 폭탄 테러를 하던 무장전선의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이 단체는 일본의 식민지 책임을 강력하게 촉구하며 무장투쟁에 나선 일본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조직이다. 1974년 8월14일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 ‘전범 기업’으로 비난 받는 미쓰비시중공업의 도쿄 본사 건물을 폭파했다. 8명이 사망하고 무려 376명이 다쳤다. 이들은 테러 한 달 뒤 성명을 내고 “미쓰비시는 옛 식민주의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으로 기능했다. 장사라는 탈을 쓰고 시체를 뜯어먹는 기업”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폭탄 테러는 1975년 5월 주요 조직원들이 체포될 때까지 미쓰이물산, 다이세이건설 등 일본 ‘전범 기업’으로 계속 확대됐다. 조직원들은 대학생, 회사원 등 평범한 사람들어서 더욱 충격을 줬다.

기리시마는 1975년 4월 도쿄 긴자에 있던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사건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지명 수배가 됐다. 이 연구소는 1966년 일본 생산성본부 산하기관으로 설립됐다. 무장전선은 이 기관이 전범 기업에 한국 관련 정보를 넘겨주는 거점이라고 판단했다. 아사히신문은 “기리시마는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다른 사건에 개입을 언급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가 숨지며 정확한 사실관계는 밝히기 어렵게 됐다.

기리시마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세간의 관심은 그가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집중됐다. 그는 수배 기간의 상당 부분을 가나가와현 후지사와시에서 살면서 근처 토목 회사에 다녔다. 일본 곳곳에 사진과 함께 ‘키는 160cm, 심한 근시, 입술이 두껍고 큰 편’이라는 인상착의가 설명된 수배 명단이 붙었지만, 도쿄에서 멀지 않은 수도권에서 태연하게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신분을 확인해야 할 휴대전화, 건강보험증. 면허증 등은 소지하지 않았다. 통장을 만들 수 없었는지 현금만 사용하는 등 아날로그적 생활을 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1년 전 위암 진단을 받았지만,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주하던 집도 상당히 열악했다. 3평 정도 크기의 방에는 변변한 가구도 없고, 일회용 빈 도시락 등이 가득했다고 한다.

경찰의 수배 전단 속 기리시마 사토시의 모습과 비교적 최근의 얼굴 모습. NHK 방송 갈무리

그렇다고 기리시마의 삶이 완전히 고립돼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집 근처 단골 술집 관계자는 일본 언론에 “기리시마가 음악, 특히 블루스 등을 좋아했다. 우리 가게에서 라이브를 할 때는 맨 앞줄에 앉아 즐겼다”고 증언했다. 단골 목욕탕 주인도 “잘 웃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기리시마가 자신이 속했던 무장전선의 1974년 교본을 참고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교본에는 폭탄 제조뿐만 아니라 조직원의 행동 방침 등이 나온다. 그 안엔 “거주지에서 극단적인 비밀주의, 폐쇄주의는 오히려 위험하다. 표면상은 지극히 보통의 생활인으로 활동할 것” 등이 적혀 있었다.

기리시마의 등장에 굉장히 당혹스러워 한 것은 경시청 공안 당국이다. 지지통신은 “기리시마는 ‘국외로 도피했다’는 유력한 정보가 있었다. (공안 당국은) 솔직히 일본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가나가와현에서 살고 있었다. 당국의 대실패”라고 전했다. 앞서 기리시마의 공범 2명이 국외로 도피한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공범이 도피하면서 기리시마는 영원히 수배에서 풀려날 수 없게 됐다. 공범이 국외로 도망가며 기리시마의 공소시효가 정지됐기 때문이다.

기리시마의 친척들은 주검 수습을 거부했다. 이럴 경우, 사망한 곳의 지방자치단체가 화장을 한 뒤 무연고로 사찰에 매장하게 된다.

기리시마의 자수와 사망의 불똥은 뜻밖의 장소로 튀었다. 지난 1일 살인미수로 수배 중인 폭력단 간부가 익명의 신고로 3년6개월 만에 나가노현에서 체포됐다. 이번에 잡힌 이는 경찰이 붙인 지명수배 포스터에서 기리시마의 왼쪽 옆에 있던 사람이다. 일본 신문·방송 등은 기리시마의 얼굴이 담긴 지명수배 포스터가 연일 보도되면서 그 옆에 있던 이도 자연스레 대중에 노출된 결과라고 짚었다. 일본 경시청 간부는 아시하신문에 “지명수배된 용의자는 대부분 일반 시민의 신고로 잡힌다. 이 체포는 기리시마 뉴스가 크게 보도된 것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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