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시간 싸움’…사법 리스크 둘러싼 3가지 시나리오
11월 미국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다시 나설 가능성이 크게 높아진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최대 적은 누구일까? 물론 대선 상대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다. 그러나 더 큰 진짜 적은 어디로 향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사법 리스크라고 할 수도 있다. 재판이 얼마나 빨리 진행되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그와 바이든의 지지율 다툼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때문에 미국 민주주의가 소수 판사들 손에 달려 있다는 우려가 이어진다.
트럼프는 지난해 4개의 형사사건으로 기소됐다. 미국 대선과 불가분하게 얽힌 이 사법 리스크를 트럼프의 입장에 서서 최상, 최악, 중립 3개 시나리오로 나눠 살펴본다.
최상: 대선 전 선고 불발
트럼프 입장에서 최선의 경우는 11월5일 대선 전까지 재판과 선고를 지연시켜 사법 리스크가 대선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트럼프는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대선일 전에 유죄 판결이 나오는 것을 피하려고 지연전을 벌인다.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에는 그가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는 지지자들을 선동해 일으킨 ‘1·6 의사당 난동’ 관련 사건이 계류돼 있다. 트럼프는 다른 법원들에도 성관계 입막음 돈과 관련된 회계 조작, 백악관 기록물 무단 반출, 조지아주 대선 결과 번복 압박 사건으로 각각 기소돼 있다. 의사당 난동 사건은 그 중 가장 심각한 내용인데다 재판 일정도 3월4일로 가장 먼저 잡혀 있었다. 이 ‘가장 앞서 있고 가장 중요한 사건’에서 재판이 순조롭게 진행돼 대선 전에 유죄가 선고된다면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이 재판을 지연시키려고 ‘대통령 재임 중 행위는 면책 대상’임을 확인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워싱턴 연방지법의 담당 판사 타냐 처칸은 이를 기각했지만, 문제는 트럼프가 항고하면서 본안 재판 진행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미국 법원은 헌법상 권리가 쟁점인 신청 사건이 제기되면 본안 재판을 멈춘다. 이에 따라 처칸 판사는 재판 준비 절차까지 중단돼 예정대로 재판을 진행할 수 없다며 지난 2일 무기한 연기를 결정했다.
하지만 워싱턴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지난달 변론 때 “길거리에 있는 사람이든 대통령이든” 죄를 지었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데 이어 6일 트럼프의 면책권 주장을 기각했다. 이로 인해 재판 시계가 다시 돌아갈 가능성이 커졌다.
그래도 트럼프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연방대법원에 재항고해 하면 된다.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구도가 보수 6 대 진보 3으로 확실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보수 대법관 6명 중 트럼프가 지명한 대법관이 3명이나 된다. 연방대법원은 면책 주장이 헌법적 근거가 없다고 보더라도 결정을 늦춤으로써 그를 도울 수 있다. 5일 발표된 시엔엔(CNN) 여론조사에서 ‘대선 관련 사건들에서 연방대법원이 옳은 판단을 내릴 것으로 보냐’는 질문에 ‘충분히 그럴 것’이라는 응답은 11%, ‘적당히 그럴 것’이라는 응답은 31%에 그쳤다. ‘조금만 그럴 것’은 35%, ‘전혀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대답은 23%였다. 연방대법원의 중립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기대치가 그만큼 낮다.
최악: 유죄 선고, 표심에 악영향
최악의 시나리오는 주요 사건에서 유죄가 선고되고, 그 결과 지지자들이 떨어져나가는 경우다.
트럼프는 일단 당선되면 스스로를 사면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시엔엔 여론조사에서도 78%의 미국인이 그가 당선되면 스스로를 사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로서는 대선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며 법원을 ‘관리’하는 게 정치인으로서나 ‘자연인’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선거에서 지고 유죄를 선고받으면 말년을 감옥에서 보낼 수 있다. 그래서 트럼프의 선거운동은 자기 구명 운동을 겸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를 후원하는 정치활동위원회가 정치자금 5천만달러(약 666억원)를 그의 법률 비용으로 쓴 것도 선거와 소송이 얽힌 처지를 보여준다.
트럼프가 대선 전에 유죄를 선고받으면 당락에 심각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은 여러 여론조사가 잇따라 뒷받침하고 있다. 5일 발표된 엔비시(NBC) 방송 여론조사 가상 대결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을 47% 대 42%로 앞섰지만, 유죄를 선고받았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는 43% 대 45%로 뒤졌다. 블룸버그와 여론조사 업체 모닝컨설트가 지난달 31일 발표한 7대 경합주 여론조사에서는 유죄를 선고받으면 그에게 표를 주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거나 어느 정도 그럴 것 같다고 응답한 이들이 53%에 달했다. 공화당원들 중에서도 23%가 이런 입장을 보였다.
가장 민감한 의사당 난동 관련 사건 재판은 일단 무기한 연기됐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다. 항소법원도 기각한 면책 주장을 심리할 것으로 보이는 연방대법원이 그를 ‘배신’하면 곤란해진다. 연방대법원이 아예 이를 심리하지 않겠다며 각하 결정을 내리면 워싱턴 연방지법 재판은 더 빨리 속개될 수 있다. 여론도 유무죄를 빨리 가리자는 쪽이다. 시엔엔 여론조사에서는 64%가 의사당 난동 관련 판결이 대선 전에 나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면책권 주장에 대한 연방항소법원 심리에 출석한 뒤 자신의 주장이 수용되지 않으면 “이 나라에 난리가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만큼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중립: 일부 재판·선고 이뤄지나 피해 최소화
일부 재판이 진행돼 선고까지 이뤄졌지만 대선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시나리오는 그동안 많이 거론되지 않았으나 점점 그 가능성이 떠오르고 있다. 4건 중 가장 먼저 공판기일이 잡혔던 의사당 난동 관련 재판이 미뤄지면서 뉴욕 맨해튼 검찰이 기소한 성관계 입막음용 돈 지급 관련 회계 부정 사건사건이 우선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사건의 첫 공판기일은 3월25일로 예정돼 있다. 기밀 무단 유출 사건의 첫 공판기일은 5월20일로 잠정적으로 잡혀 있다. 마지막 사건인 조지아주 대선 결과 번복 요구 사건은 일정이 안 나왔다. 게다가 그를 기소한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의 패니 윌리스 검사장이 이 사건 수사를 위해 채용한 네이선 웨이드 특별검사와 ‘사적 관계’를 맺은 게 드러나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트럼프라는 거물 중의 거물을 처벌하는 것은 검찰이나 법원에 큰 부담이 따른다. 맨해튼 검찰은 연방 검찰이 기소한 의사당 난동 사건 관련 재판이 먼저 진행되기를 희망해왔다. 반트럼프 진영도 2020년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고 의회의 대선 결과 인증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려 한, 반란과 다름없는 사건에 대한 재판과 선고가 먼저 진행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제 대선 전에 맨해튼 검찰 사건 등 다른 사건만 선고가 이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트럼프가 포르노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에게 성관계 입막음용 돈 13만달러(약 1억7천만원)를 주고 회사 장부에 법률 비용으로 허위 기재한 것은 2016년 대선을 거쳐 대통령이 되기 전이라 면책특권을 주장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은 4건 중 가장 경량급이다. 트럼프가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그의 변호인단이 이를 가장 먼저 재판이 진행될 사건으로 보고 대비해왔으며, 4건 중 ‘가장 약한 고리’로 본다고 전했다. 연방 검사 출신인 로버트 민츠는 이 재판이 가장 먼저 진행되는 것은 “검사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일 수 있다”고 이 신문에 말했다. 성관계 입막음용 돈 지급이라는 소재는 트럼프를 지저분하게 보이게는 만들 수 있지만, 유력 대선 주자를 단죄하기엔 무게가 떨어진다. 또 이 사건은 지난해 3월 트럼프에 대한 첫 기소 사례였지만 오히려 지지율을 밀어올리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유죄 입증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애초 연방 검찰이 이 문제로 트럼프를 기소하려다 단념했고, 이후 맨해튼 검찰이 그를 법정에 세웠다. 연방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것은 혼외 관계를 숨기려고 불법 정치자금을 동원한 혐의로 기소된 존 에드워즈 전 민주당 상원의원의 처벌에 실패한 경험 때문이다. 2004·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선 에드워즈는 혼외 관계가 드러나 선거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으려고 후원자들을 동원해 상대에게 거액을 준 혐의로 기소됐다. 에드워즈는 암에 걸린 아내를 생각해 가정을 지키려고 한 행위라고 변명했다. 2012년 법원 배심원단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다른 혐의들을 놓고는 배심원단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트럼프는 포르노 배우와의 성관계를 부인한다. 다만 허위 주장으로부터 가정을 지키려고 돈을 줬다고 주장한다. 그의 변호인들도 에드워즈 사례를 들면서 무죄를 주장한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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