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체면이 없는 직업, 그래도 가끔은 체면을 생각해야[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4. 2. 1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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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가진 KBS ‘특별대담 대통령실을 가다’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지난달 17일 대구시청에서 홍준표 시장을 인터뷰했다. ‘달빛철도특별법’이 국회 법사위에 상정되지 못해 홍 시장이 뿔이 좀 나 있던 시점이었다. 그는 신문 인터뷰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달빛철도’에 썩 우호적이지도 않은 매일경제신문의 인터뷰 제의에 큰 뜸 들이지 않고 응했다.

DJ정부 시절에 국회를 출입했지만 여당 담당이었으므로 홍 시장을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다(국회에서 몇 번 마주쳤고 전화 통화를 한번 한 적은 있다). 근자에 ‘노원명 에세이’에서 홍 시장을 한번 다뤘다. 그가 피드백에 해당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적도 있어 약간의 친근감을 기대하고 대구에 내려갔다.

친근감 따위는 없었다. 자리에 앉은 홍 시장의 표정에선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나 당신 불편해’ 그런 느낌 말이다. 딱하게도 나는 그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할 주변이 없는 기자다. 첫 질문부터 역정을 낸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느냐고 모욕을 준다. 달빛철도는 그가 전문가이니 항변을 하기도 어렵거니와 내가 예상한 ‘홍준표’와 한치의 어긋남이 없었기에 속으로는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첫 15분 동안 ‘그만 합시다’하고 일어서려 하는 장면이 세 번 정도 있었다. 내 눈에 그것은 다분히 의도된 오버액션으로 보였지만 ‘시장님 그게 아니고요’하고 세 번 붙잡았다. 오버액션에는 오버액션으로 대응해야 한다. 사람의 행동이라는건 관성에 지배받기 때문에 일어서려 할 때 잡지 않으면 정말 나가버리는 수가 생긴다.

그 후 인터뷰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사실 홍시장에게는 질문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넘치는 사람으로 잘 들어주면 된다. 간혹 추임새삼아 ‘누구는 이런 얘기도 하던데요’ 한마디 던지면 또 좌르륵 쏟아낸다. 쏟아내지만 대충 하는 얘기가 아니다. 본인이 A를 얘기했는데 기자가 A에 1을 더해 질문하면 귀신같이 1을 잡아낸다. ‘그거는 좀 안 맞는 얘기고...’ 드물게 샤프한 머리다.

그날 홍 시장과는 예정 시간을 30분 넘겨 대담했는데 인상에 남을 만큼 즐거웠다. 그의 글과 말을 보고 듣다 보면 새로운 생각을 접할 때 느끼는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가장 흡족했던 것은 일어서려는 홍 시장을 붙잡은 것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배석한 후배에게 말했다. ‘영감이 그냥 나갔으면 어쩔 뻔했냐.’ 회사를 대표해 당대의 인물을 만났는데 인터뷰가 중도에 어그러지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홍 시장이야 병가지상사겠지만. 다시 가슴을 쓸어내린다.

25년간 기자생활을 하면서 여러 인터뷰를 했다. 생각해보면 비굴하지 않았던 인터뷰는 하나도 없었다. ‘말을 안해주면 어떻게 하나’ 하는 항상적 공포를 안고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의 지위고하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해줄 말이 있는 상대는 항상 갑이다. 그들이 입을 닫을까, 전화를 끊어버릴까 늘 조마조마했다. ‘병풍’의 김대업, ‘김홍걸 게이트’의 최규선 같은 이에게서 한마디 얻어내기 위해 속으로 ‘사기꾼’을 되뇌면서 겉으로는 공손과 친근함을 가장해야 했다.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피의자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다가가는 기자를 피의자는 잔인하게 느끼겠지만 그러나 이때 갑은 피의자 본인이다. 질문하는 기자는 죽어도 갑이 될 수 없다.

지난 7일 방영된 윤석열 대통령 KBS 대담을 보면서 나는 직업적으로 대통령의 답변보다는 기자의 태도와 질문에 눈길이 갔다. 내가 생각할 때 기자가 을이 아니라 인터뷰 상대와 대등한 위치에서 질문하는 자리가 있다면 대통령의 공개 기자회견이 아닐까 한다. 그 자리는 ‘국민의 대표’로서 기자의 대표성이 형식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자리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이고 기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런 현실적 위계를 초월해 국가권력의 대표자와 국민의 대표자로서 말을 나누는 것이 민주주의의 오래된 의례인 것이다.

질문자는 방송기자답게 매끄럽게 말했지만 비굴해 보였다. 내가 홍준표 시장을 대할 때만큼이나 비굴해 보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홍 시장뿐 아니라 해줄 말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굴했고 그것을 치욕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내가 기사를 얻는 방식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할 말이 있어 청한 회견에 국민을 대표해 나간 기자가 비굴해선 안 된다. 그 대담에서 내 신경을 특히 자극한 것은 시종 상체를 앞으로 들이밀고 질문하는 기자의 자세였다. 대통령은 의자에 반듯이 앉아 여유롭게 답변하는데 기자는 허리부터 목까지 20도쯤 기울이고 듣고 있다. 국민의 대표자라기보다는 기껏 KBS를 대표해 나간 것 같고(단독 대담의 형식으로볼때 KBS대표가 더 진실에 가까울 수는 있겠다) 참모처럼 공손하다.

태도뿐만 아니라 질문도 공손하다. 공손한 것은 좋은데 쓸데없는 질문이 많다. 가령 정치분야 질문에서 ‘국정지지율에 만족하나’ 한번 물었으면 된 것을 ‘낮은 지지율 때문에 국민들이 야속하지 않나’ ‘다른 나라 대통령들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위안을 얻나’ 같은 한가하고, 낯 간지러운 추가 질문을 계속 던진다. ‘배현진·이재명 의원 피습에 대한 대통령 의견’을 묻는데 물론 못할 질문은 아니다. 그러나 1시간 30분짜리 대담에 구겨 넣을 질문도 아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뻔하고 실제로 뻔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개 식용 금지법’ 얘기를 한다. 전후 맥락을 보니 김건희 여사의 국정 영향력을 떠 보려는 질문으로 보인다. 아니 고작 1시간 30분 대담인데 떠보긴 뭘 떠보나. ‘김 여사가 개식용 금지법 말고도 여러 국정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비판적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고 그냥 물으면 될 것 아닌가. 이리저리 비껴간 질문에 대통령은 별로 ‘기사가 안 되는’ 답변만 내놨다.

“이른바 파우치, 외국회사의 조그마한 백이죠.” 질문자의 이 표현은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명품백’이라는 선입견의 주입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였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나 ‘저 친구 쫄았군’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국민을 대표해 나갔으면 단어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 ‘명품백’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조그마한 백’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 나 같으면 그냥 ‘디올 파우치’라고 불렀을 것이다. ‘이른바 파우치’ 말고 ‘디올 파우치’. 고유 명사가 있는데 왜 어버버 인가.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여당에선 김 여사가 정치공작의 희생자가 됐다고 주장한다. 동의하시나?” 아니 그럼 대통령이 동의하지 동의 안 하겠나. 이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여당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이렇게 질문을 해야 이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명확한 인식을 들을 수 있다. 대통령이 불편해하든 말든.

1월26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혐의에 대해 1심 무죄 판결이 있었고 사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었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수사 책임론이 불같이 일었다. 당연히 그 책임론에 관해 물었어야 한다. 내가 그날 대담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이유도 그 대답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질문은 끝까지 안 나왔다. 질문은 있었는데 편집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보내지 않으면 없었던 것이다. 물어야 할 것은 묻지 않고 “(디올백 사건으로) 부부싸움을 하셨나” 같은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 한심해서 더 이상 보지 않고 자 버렸다.

의례는 의례다워야 한다. 민주주의의 아주 중요한 의례가 약식으로, 그것도 싱겁게 끝났다. 이런 회견은 한국 언론의 수준을 드러내는 듯하여 보기에 불편하다. 평생을 비굴해도 단 한 번 비굴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다. 그때 마저 비굴하면 망신을 산다. 그게 본인의 수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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