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일타쌍피 스토리노믹스]

박병률 기자 2024. 2. 1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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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과 애자일 방법론

자료=픽사베이

하이퍼 리얼리즘. 어느 평론가는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이렇게 평가했다.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기법을 말한다. 우리말로는 극사실주의다.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사진처럼 세세하게 묘사한다고 해서 슈퍼 리얼리즘, 포토 리얼리즘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극사실주의에서도 작가의 주관은 들어간다. 작가 의도에 따라 조명과 초점, 셔터타이밍, 촬영각도 등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느낌을 관객들에게 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판교 라이프 실사판이라 불리는 이유

<일의 기쁨과 슬픔>은 요즘 2030대 직장인의 삶과 생각을 엿보기에 딱 좋은 작품이다. 배경은 판교 테크노벨리. 이곳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의 일상과 판교의 풍경이 세세히 묘사돼 있다. IT, 스타트업이라는, 청년들이 선망하는 직종 속에 녹아있는 직장인들의 ‘기쁨’과 ‘슬픔’을 놓치지 않는다. 여기에는 막내, 여성 직장인이 조직 속에서 겪는 은근한 차별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는다. 때문에 이 작품은 온라인 공개 당시부터 ‘판교 라이프 실사판’이라 불리며 많은 공감을 받았다.

장류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여기 실린 소설은 모두 회사에 다니는 동안 발표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실제 IT회사에서 7년간 근무를 했다. 그 경험을 현직에 있으면서 글로 옮겼으니 ‘리얼리즘’이 ‘하이퍼’한 것도 이해가 된다.

거북이알의 정체는

김안나는 중고거래 스타트업 ‘우동마켓’에 근무하는 기획자다. 우동마켓은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을 줄인 말인데, 중고거래 스타트업 중에서는 그래도 안정기에 접어든 회사다. 사용자를 모으는 데는 성공했고, 이제 지역광고만 붙인다면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다. 우동마켓 사용자 중에 ‘거북이알’이라는 이름을 쓰는 유저가 있다. 강남과 판교 지역에서 하루에 100여개씩 글을 올린다. 중고물품을 파는게 아니라 뜯지도 않은 새 상품을 판다. 파는 상품에는 일관성도 없다. 하지만 거래 성사율은 100%. 그로인해 페이지뷰, 사용자수, 재방문율이 일제히 상승했다. 거래성사율도 높아졌다. 그는 우수 사용자일까, 아니면 어뷰저(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얻는 부정행위자)일까. 아무래도 거북이알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던 대표는 ‘사실상의 막내’인 안나에게 거북이알을 만나보라며 등을 떠민다. 거북이알이 내놓은 캡슐커피머신을 직거래한다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장소는 판교역, 시간은 점심시간이다.

자료=YES24
애자일 방법론이란

대표가 안나에게 거북이알을 만나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일 스크럼 회의’에서 나왔다. “합시다 스크럼” 대표의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우동마켓은 매일아침 9시 일일 스크럼회의를 갖는다. 작가는 소설에서 ‘스크럼이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애자일 방법론의 필수요소로, 우리 회사같은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젝트 관리기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크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애자일 방법론을 이해해야 한다. 애자일 방법론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나왔는데 ‘짧은 주기로 반복실행하면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장기과제를 세우고 세부적 전략을 마련한 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기적 과제를 빠르게 수행해 나가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소프트웨어를 완성해 나가는 기법이다. 1990년대 중반 인터넷 웹브라우저의 최강자는 넷스케이프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개발선언 1년만에 익스플로러를 내놨고 3년만에 넷스케이프를 따라잡았다. 이 과정에서 MS가 쓴 방식이 훗날 애자일 방법론으로 불리게 됐다. MS는 웹브라우저를 우선 만들어 출시한 뒤 발견되는 버그를 잡고 고객의 니즈를 빠르게 수용하며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을 썼다.

이처럼 애자일 방법론에서는 계획을 세우고 세부안을 완성한 뒤 이에 맞춰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잘게 쪼개 우선순위에 따라 필요한 것부터 반복적으로 실행하면서 프로그램을 완성해나간다. 의사결정이 빨라 나날이 변하고 사용사이클이 짧아지는 외부변수에 대응하기에 유용하다. 다만 시행착오는 훨씬 많을 수 밖에 없고 장기적인 리스크에 취약할 수 있다.

자료=픽사베이
미식축구에서 나온 ‘스크럼’

애자일방법론 중 가장 즐겨쓰이는 방식 중 하나가 스크럼(Scrum)이다. 스크럼은 미식축구 경기에서 파생된 용어로 양팀이 서로 밀집해 팔을 꼭끼고 하나의 집단을 형성해 상대팀을 앞으로 밀치는 대형을 말한다. 경영분야에서 스크럼은 적은 인원으로 팀을 구성한 뒤 주기적인 회의를 통해 작업을 계획하고, 스프린트라는 짧은 개발주기동안 작업을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스포티파이, 페이스북 등이 이같은 전략을 써 경쟁자를 넘어섰다.

스프린트 기간에는 일일 스크럼회의를 열어 필요한 아이디어를 즉시 개발자에게 공급해야 한다. 스크럼회의는 모든 팀원이 참석해 매일, 서서 진행하고, 약속된 시간에 짧게한다는 원칙이 있다. 또 회의내용은 한사람씩 어제 한일과 오늘 할일을 얘기하되 진행상황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공유하는 선에서 마무리 해야한다. 스크럼회의를 진행하는 스크럼마스터는 팀원들의 작업에 방해되는 요소를 찾아 해결해 주고, 개개인의 일 진척상황을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스크럼의 핵심은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되 늘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15분을 넘긴 회의가 매일 반복된다면 오히려 속도감있는 진행을 방해할 수 있다. 우동마켓도 당초 취지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다. 안나는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 조회로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십오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이십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삼십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며 말한다.

“회사에서 울어본 일이 있나요”

큰 기대를 가지고 입사했지만 관료화되고 경직된 조직에 절망하는 젊은 직장인이 많다. 제아무리 좋은 미국식 경영프로그램도 태평양을 넘어 한국으로 들어오면 변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는 식이다. 우동마켓의 영어존칭 쓰기도 취지와 달라져간다. “데비빗(대표)께서 말씀 하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동등하게 소통하자는 취지는 사라져 버린다. 이곳은 실리콘밸리가 아니고 판교 테크노벨리다. 절망은 때로 “회사에서 울어본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알랭 드 보통의 동명의 에세이에서 따온 제목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일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의 희망을 추구하는 완벽한 거품 정도는 제공해 줄 것이다. 우리의 끝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것이다. 품위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 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직장이, 일이 알랭 드 보통의 생각과 달리 ‘더 큰 괴로움’을 주는 존재가 된다면 직원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사표를 던지고 떠나는 선택지는 쉽지 않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호구지책은 필요하다.

자료=픽사베이
K 직장인이 사는 법

“전 퇴근하고 나면 회사 생각을 안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그래요. 사무실 나서는 순간부터는 회사 일은 머릿속에서 딱 코드 뽑아두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봐요”

안나의 말에 거북이알이 장단을 맞춘다. 직장에서 성취감을 갖지 못하는 청춘들은 직장 밖에서 타협점을 찾는다. 거북이알에는 거북이 ‘람보’와 ‘마쎄’가, 케빈에게는 레고가 있다. 그리고 안나에게는 ‘조성진’이 있다. 안나는 다음달 조성진 홍콩 리사이틀을 관람할 예정이다. 공휴일과 주말 그리고 아껴둔 연차를 하루 붙여 만든 3박4일간 놀고 공연도 볼 예정이다. 홍콩행 왕복티켓이 좀 비싸지만 안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 K 직장인들은 이렇게 산다.

박병률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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