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내가 바로 조선 최초의 오페라 테너이자 동양 최고 테너요" 일제 강점기의 또 다른 이야기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2024. 2. 1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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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테너 이인선과 뮤지컬 '일 테노레'
테너 이인선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제 강점기 동양 최고의 테너라는 호평을 받은 성악가. 오페라 개척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한국 오페라의 선구자인 테너 이인선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왜 갑자기 테너 이인선(1907-1960)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요? 지금 이 사람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일 테노레'라는 뮤지컬이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어인 '일 테노레(Il Tenore)'는 '테너'라는 뜻입니다.
 

'동양 최고의 테너' 이인선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인선은 의사이자 성악가였습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에 미국 선교사로부터 피아노와 성악을 배웠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의전 졸업 후 황해도 해주에서 병원을 열었지만 성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 주선으로 1934년 이탈리아 밀라노 유학길에 오릅니다.

전설적인 테너 티토 스키파(Tito Schipa)가 활약했던 라 스칼라 극장이 있는 곳, 밀라노에 가는 것은 이인선의 꿈이었습니다. 스키파는 유성기 음반 시대, 경성에서도 꽤 알려진 스타였습니다. 이인선은 밀라노에서 스키파의 스승이었던 에밀리오 피콜리(Emilio Piccoli)와 테너 알프레도 체키(Alfredo Cecchi)를 사사했고, 틈틈이 밀라노 왕립의학원에서 의학 공부도 했습니다.

1937년, 밀라노에서 돌아온 이인선은 경성 부민관에서 귀국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처음 듣는 듯한 놀라운 성량과 세련된 선율에 도취경에 빠진 2천 청중은 자리를 떠날 줄 모르며 박수갈채로 열광적 감탄을 마지 아니하였고….'(조선일보 1937년 5월 22일)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독창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는 도쿄와 베이징, 칭다오에서도 독창회를 열어 '동양의 스키파' '동양 최고의 테너'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이탈리아 가곡과 오페라 관련 서적을 펴내며 한국의 오페라 개척에 나섰습니다. 광복 후인 1946년, 역시 성악가였던 동생 이유선과 박승유, 김자경, 송진혁, 김영순 등 제자들과 함께 '국제 오페라사'를 창립하고, 1948년 1월, 명동 시공관에서 한국 최초의 오페라, 베르디의 '춘희(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합니다. 이인선이 알프레도, 김자경이 비올레타를 노래했죠. 우리 음악사에 남을 역사적인 무대였습니다. 1950년 1월에는 비제의 '카르멘' 총감독과 주역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1948년 첫 오페라 춘희 포스터 / 출처: 연합뉴스


이인선은 '카르멘' 공연을 마치고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50년 4월, 미국 내슈빌종합병원으로 연구차 가는 도중 도쿄와 하와이에 들러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1951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회비 1천 달러 낼 돈이 없어 출연을 연기해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의사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성악을 놓지 않다가, 1960년 간암으로 타계했습니다. 미국에서 병원을 차리고 돈을 벌어 오페라 운동을 재개하겠다는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일제 시대에 '동양 최고의 테너'로 불렸고, 한국 최초의 오페라 주역이었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디션에 합격했던 테너라니, 실존 인물 이인선의 삶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합니다. 창작자들이라면 탐낼 만한 소재가 될 수 있죠.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잘 알려진 작가 박천휴-작곡가 윌 애런슨 콤비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일 테노레'가 탄생했습니다.
 

일 테노레, 테너 이인선 아니라 윤이선

저는 처음에는 '일 테노레'가 이인선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뮤지컬에 어떤 오페라가 등장할지, 실제로 한국 최초 오페라였던 '라 트라비아타'가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른 뮤지컬 '일 테노레'는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뮤지컬은 이인선의 삶을 무대에 재현하지 않습니다. '일 테노레'에는 의학도였지만 오페라 가수의 꿈을 갖게 되는 윤이선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인선에서 모티브를 따오긴 했지만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고, 주변 인물들도, 벌어지는 사건들도 모두 허구입니다. 먼저 시놉시스를 볼까요.
항일운동 모임인 '문학회' 멤버들은 점점 심해지는 총독부 검열을 피할 방법을 찾던 중 뜻하지 않게 이탈리아 오페라 공연을 계획합니다. 침략에 맞서 싸우는 베네치아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I Sognatori-꿈꾸는 자들'이 경성 시민들의 항일 정신을 고취할 것이라 기대하며, 이 낯선 '서양 창극'을 공연하기 위해 뭉치는 사람들. 그 중심엔 자신도 몰랐던 특별한 테너의 목소리를 가진 의대생 윤이선, 지금 경성에서 가장 영민한 리더이자 연출 서진연, 자칫 위험할 정도로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이자 무대 디자이너 이수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뜻하지 않게 흘러가는 상황 속, 이들의 '조선 최초 오페라'는 무사히 공연할 수 있을까요..
 

극 중 오페라 '꿈꾸는 자들'은 어떤 작품인가

뮤지컬 일 테노레 (IL TENORE) - '꿈꾸는 자들' 1막 1장 & Aria Ⅱ (부민관 공연 ver)│서경수 / 출처 : OD COMPANY 유튜브

테너가 주인공인 뮤지컬 '일 테노레'에는 당연히 오페라가 등장합니다. 베르디의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가 대사로 언급되고, '리골레토' 중 유명 테너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이 울려 퍼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 테노레'에서 가장 중요한 오페라는 '꿈꾸는 자들'입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베네치아 사람들 이야기인데, 안토니오와 나탈리아라는 캐릭터의 러브 스토리도 나오는 이탈리아 오페라입니다. 그런데 '꿈꾸는 자들'은 누가 작곡한 오페라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요?
사실 '꿈꾸는 자들'이라는 이 오페라는 현실에는 없습니다. '일 테노레' 뮤지컬 속에서만 존재하는 오페라, 이 뮤지컬 창작진이 만들어낸 허구이니까요. 윤이선은 이 오페라 아리아를 우연히 듣고 마음을 빼앗겨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작곡가 윌 애런슨은 '꿈꾸는 자들'의 아리아 두 곡, '꿈의 무게', '그리하여, 사랑이여'를 작곡했습니다. 이 오페라는 처음엔 이탈리아어로 불리지만, 우리말로 번역되어 '조선 최초 오페라'로 무대에 오르게 됩니다. 오페라 아리아 두 곡은 계속 다양하게 변주되며 이 뮤지컬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오페라 속 연인 안토니오와 나탈리아는 윤이선과 서진연의 관계로 연결됩니다.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7528923&plink=YOUTUBE&cooper=DAUM]

[SBS 뉴스 사이트에서 해당 동영상 보기]
[ 원문 링크 : https://news.sbs.co.kr/d/?id=N1007528923&plink=YOUTUBE&cooper=DAUM]

암흑 같은 현실 속에 미래를 꿈꾼 젊은이들

오페라 제목이 '꿈꾸는 자들'인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소심한 의학도였던 윤이선은 오페라를 만난 후 자신의 목소리를 찾고, 오페라 가수라는 꿈에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붓습니다. 독립운동가 서진연과 이수한은 이 오페라가 애국심을 고취시켜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며 공연 제작에 참여합니다. 윤이선의 성악 선생으로 오페라 지휘를 맡는 베커 여사, 다양한 배경을 지닌 연주자들도 각자의 꿈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바로 '꿈꾸는 자들'입니다.

이 뮤지컬은 결국 '현실이 암흑 같을수록 더 밝은 미래의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우리가 애쓰면 그만큼 세상이 나아질 거라 믿었던, 나라를 빼앗겼지만 꿈은 빼앗기지 않았던', 100년 전 이 땅을 살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입니다. 박천휴 작가는 '극도로 화려한 예술인 오페라와, 비극적이고 어두운 역사인 일제 강점기의 대비를 통해, 인생의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려 애쓰며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이 공연의 무대는 스토리의 큰 줄기인 독립운동과 오페라가 모두 앞이 아닌 뒤에서, 단 한순간을 위해 준비한다는 공통점에 착안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무대 조명이 환하게 켜지는 그 순간을 위해 어두운 백스테이지에 일하는 사람들. 독립운동 거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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