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를 앞둔 판사의 제안…“전세사기 법정 최고형 높여야” [취재후]

이희연 2024. 2.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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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명 넘는 피해자와 취재진이 법정을 가득 채웠습니다. 인천 미추홀구 일대에서 건물 2,708채를 지어 피해자 563명에게 전세 보증금 453억 원을 가로챈 이른바 '건축왕' 남 모 씨의 선고 공판이었습니다.

지난 7일, 10달에 걸친 재판 끝에 피해자 191명에 대한 1심 선고가 먼저 나왔습니다.

법원은 남 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습니다. 사기죄의 최대 형량인 10년에, 2건 이상의 사기를 저질러 '경합범 가중' 규정에 따라 최대 2분의 1까지 형을 더한 겁니다. 사기죄로는 '법정최고형'입니다.

인천지법 형사1단독 오기두 판사는 판결에 앞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법원은 국회가 만든 법률에서 정한 처단형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이 사건과 같이 국민에게 필수 조건인 주거생활의 안정을 파괴하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피해자들의 삶과 희망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주택 거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망가뜨린 악질적인 사기 범죄에 대해 입법부에서도 법률을 제정해줄 것을 제안한다."

입법부를 향해 사기죄의 법정 최고형 형량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한 겁니다. 선고를 앞둔 판사가 입법부에 의견을 피력하는 건, 몹시 이례적입니다.

■ 190쪽짜리 판결문…"제발 살려주세요"

오 판사는 해당 사건의 판결문이 190쪽에 이른다고 설명했습니다. 선고에만 1시간 30분이 걸렸습니다.

오 판사는 "남 씨 일당의 범행은 사회초년생, 신혼부부, 노인 등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을 상대로했다"며 " 이 사건 피해자들의 보증금은 대출받거나, 퇴직금 또는 평생 일하여 모은 돈으로 전 재산이자 거의 유일한 재산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이 사건 피해자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엄벌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오 판사는 "위 사정을 피고인 전체에 대해 불리한 양형 사유로 고려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남 씨가 LH나 정부에서 피해를 구제해 줄 테니 기다리란 말을 최후진술에서 했다"며 "자신의 범죄로 발생한 피해를 국가나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는 태도로 반성이나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고 재범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습니다.

오 판사는 "남 씨의 행위로 인한 불법과 그 결과가 참혹할 정도로 중대하다"며 "다수의 안전과 재산을 침해하는 전세사기"의 주범인 남 씨에 대해 '법정최고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남 씨에 대해 115억 5천여만 원의 추징도 명령했습니다. 그와 공범으로 재판에 넘겨진 공인중개사와 중개보조원 등 공범 9명에게는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습니다.

■ '건축왕' 재판은 현재진행형

이번 선고는 피해자 191명에 대한 판결입니다. 나머지 피해자들에 대한 재판은 아직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남 씨 일당에게는 사기죄에 더해 범죄단체조직죄가 적용됐습니다. 지난해 6월 검찰이 남 씨 일당 10명에 25명을 더해 추가 기소하면서, 이 중 18명에게는 형법상 '범죄집단'을 조직했다고 본 겁니다.

검찰은 남 씨 일당이 전세 사기 범행을 위해 역할을 분담했고, 성과급까지 주는 등 조직적으로 범행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법원에서도 이 혐의가 인정되면 범죄로 얻은 수익 모두를 몰수할 수 있어 보다 강력한 제재 효과가 생깁니다.

법원 관계자는 " 추가 재판을 통해 남 씨 등에 대한 형량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번째 재판에서는 남 씨에 대해 '일반 사기죄'가 아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하 특경법)상 사기죄'가 적용됐기 때문입니다.

특경법은 사기로 인한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 피해자들은 아직 '그 날'에


선고가 끝난 뒤 피해자들은 울먹이며 법정을 나왔습니다. 안상미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원장은 "10개월간 이 재판정을 오고 갔을 때 심정, 사망하신 분들을 보내는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며 "(전세사기는)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고 부르짖었던 것이 인정받았다"고 심정을 밝혔습니다.

남 씨에겐 중형이 내려졌지만, 피해자들의 삶은 아직도 '그 날'에 멈춰 있습니다. 가족의 보금자리이자 안락한 휴식처였던 공간이 하루아침에 지옥 같은 집이 되어 버린 그 날입니다.

여전히 경매는 진행 중이고, 누군가는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원하는 건 하루 빨리 삶을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그래픽: 권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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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연 기자 (hear@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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