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냐"던 이재명의 깜짝 결단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정치 기사를 책임지는 'the300' 기자들이 여의도 국회의 톡 쏘는 뒷이야기들을 풀어드립니다.
"깜짝 놀랐다. 다른 의원은 물론 지도부조차도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선거제는 총선을 앞두고 지난 한 해 내내 정치권에서 논의됐던 사안이다. 승자 독식, 거대 양당 독점 구도의 폐해,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지 여부 등의 문제가 모두 선거제와 얽혀 있다. 여야가 마지막까지 합의보지 못한 지점은 47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비례대표제였다.
소수정당에 보다 많은 기회가 돌아간다고 평가되는 현행 준연동형제를 유지하느냐, 거대 양당에게 좀 더 유리하다고 평가되는 병립형으로 돌아가느냐의 문제였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 '꼼수'를 막을 수 있고 이해도가 높단 이유를 앞세워 병립형을 일찌감치 당론으로 정했었다.
다당제 가치를 지향해온 민주당 내부에서는 논쟁이 길고도 치열했다. 이 대표도 대선에서 준연동형제를 옹호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었다. 이 문제는 결국 국민과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이상(준연동형)과 정권 심판을 위해 1당이 돼야 한다는 현실(병립형)의 문제로 압축됐다. 민주당은 의원총회, 여론조사 등을 통해 수차례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고 찬반 이견이 좁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 최고위원회는 결국 이 대표에게 결정권을 위임했다.
이번 총선에서 선거 승리는 민주당 과제일 뿐만 아니라 당을 이끌고 있는 이 대표의 정치 인생도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이 대표가 당연히 '현실론'을 택할 것이란 관측들이 지배적이었다. 이 대표의 고민이 깊었단 점은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 만나 "끊임없이 고민했고 (어느 방법이 맞다고) 확신하기 어려운 중요한 상황이라 2~3일 전쯤에서야 사실상 결정했다"고 밝힌데서 드러났다.
회견에서 이 대표는 "준연동제는 불완전하지만 소중한 한 걸음"이라며 "과거 회귀가 아닌, 준연동제 안에서 승리의 길을 찾겠다. 깨어 행동하는 국민들께서 '멋지게 이기는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겠다"고 밝혔다.
단 이 대표는 "정권심판과 역사의 전진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과 함께 위성정당 반칙에 대응하면서 준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 비례정당을 준비하겠다"고 해 준위성정당 설립의 길을 열어놨다.
다수 민주당 의원들이 이 결정을 존중했다. 준연동제를 고수할 것과 위성정당을 금지하자고 주장하면서 '직을 걸었던' 이탄희 민주당 의원조차도 "다행"이란 입장을 밝혔다.
이 대표는 실용주의로 대변되는 인물이었다. 성남시장과 경기지사를 지내며 굳힌 '추진력있는 유능한 행정가' 이미지는 최대 장점으로 작용하며 그를 단번에 대선주자 반열에 올려놨다. 반면 이 대표가 지난 2022년 초선 국회의원이 되고 같은 해 당 대표로 선출된 뒤 이런 장점은 종종 정치인으로서 이재명의 단점으로도 여겨졌다.
이 대표의 여의도 입성 당시, 이 대표의 측근으로 여겨지는 김병욱 민주당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행정가의 길과 국회의원의 길은 다르다. 정치권에는 카운터파트, 특히 반대 진영이 명확하기 때문"이라며 "국회에서는 컨센서스(합의)를 만들지 않으면 본인의 좋은 성과가 나올 수 없다. 반대의견을 보이는 본들과도 소통하며 장애물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이 대표가 의원의 길로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내린 많은 결정들은 원내 여론과 자주 충돌했다. 대선에 패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인천 계양을 지역구에 출마한 것이나 전당대회에 나간 것에 대해 통상의 정치 문법과는 맞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자신의 사법리스크를 당을 앞세워 회피하려 한다는 '방탄 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때부터다. 지난해 민주당이 전당대회 등에서의 대의원 권한을 대폭 축소한 것도 원내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왔다. 당 의사결정에 당원 목소리를 더 반영하기 위한 취지라곤 하나 너무 성급하게 추진된단 비판들이 나왔다.
김병욱 의원의 조언처럼, 이 대표가 원내 의견을 들어 한 발 물러서는 것으로 짐작되는 장면들도 물론 있었다.
국회 상임위원회 도중 가상자산(암호화폐)거래를 했단 의혹을 받았던 친명계(친이재명계) 의원 김남국 의원에 대해 윤리감찰을 지시한 것이나 지난해 국회 본회의 교섭단체 대표연설 중 불체포권리를 포기하겠단 선언이었다. 다만 김 의원에 대한 감찰 지시가 늦었단 비판도 당시 상존했고 이 대표는 정작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송부됐을 때 병상에서 부결을 호소해 불체포권리 포기 선언의 의미가 퇴색됐단 지적도 나왔던게 사실이다.
이 대표는 또 지난해 검찰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국회로 돌아왔을 때, 자신에 대한 체포동의안에 가결표를 던진 이들을 색출해야한단 당내 일부 여론에 대해 "가결 과정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며 논란을 일축했다. 이 대표 측근은 물론 정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양심에 따라 표결할 자유가 주어진 헌법기관인데 색출과 징계는 무리하단 의견들을 내놨었다.
그 어느 것도 중대한 결정이 아닌 것이 없었겠지만 이번 선거제 관련 결단을 내릴 때에도 수많은 의견을 들어가며 고심을 거듭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대표를 지근거리에서 봐 온 김남준 민주당대표실 정무부실장은 지난 5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이번 결정에 "상상 이상의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불가피했다"고 전했다.
김 부실장은 "이 대표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선택했다. 이 글은 그 당위성을 설명하려는 취지가 아니다. 그의 의사결정 방식, '이재명 스타일'을 기록해보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적은 글"이라며 "우선 '객관적'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은다.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꼼꼼히 따져가며 숙고한다. 결단하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고심해 내린 결단이라지만 이 대표가 내린 선거제 결정에 대해 여권과 일부 제3지대 세력에게서 비판이 거세게 나왔다. "의석 나눠먹기" "망국적 발상" "누더기 선거제"란 반응들이었다. 이 대표가 "'통합형비례정당'을 준비하겠다"고 밝힌 것 때문인데 사실상 위성정당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들이었다.
이를 이미 의식한 듯 이 대표도 "여당은 이미 위성정당을 창당하며 총선승리를 탈취하려 한다"며 "(민주당도) 결국 준위성정당을 창당하게 된 점을 사과드린다. 같이 칼을 들 순 없지만 방패라도 들어야 하는 불가피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달라"며 '해명'하고 고개숙였다. 이어 "민주당만을 위한 정당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준연동형제도가 추구하고자했던 소수 정치세력 후보들도 배제되지 않도록, 상당 정도는 비례의석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함께 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위성정당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소수정당 및 시민사회와 협의를 위한 '민주개혁진보선거연합(민주연합)'이 지난 8일 민주당 내 구성됐기 때문에 민주당이 4년전과 같은 위성정당의 길을 그대로 답습할지, 아닐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 일러보인다.
확인된 것은 이 대표의 선거제 결단이 있은 뒤 당내 106명의 의원들이 이 결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낸 데서 알 수 있듯 이 대표가 적어도 당 내에서만큼은 추가적 갈등은 불러오지 않았단 점이다. 김두관 민주당 의원은 "게도 구럭도 다 살리는, 이재명 대표의 역사적 결단을 크게 환영한다"고 했고 김상희 민주당 의원은 "대승적 결단"이라며 "우리 민주당은 '퇴행의 길'이 아닌 '진보의 길'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 대표 결단 전 한 라디오에 나와 "이건지 저건지 결정이 어려울 때 내가 조금 손해보는 쪽이 좋다는게 개인적 심정"이라 밝혔던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이 대표 결정에 대해 "대의명분을 갖고 잘 한 결정이라 본다"며 "앞으로 당장 과제는 비례대표 공천 과정을 잘 협의해서 비례대표 취지에 맞는, 민생이 어렵고 안보가 불안하니 그 분야 전문가들이 많이 들어오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실리도 챙기려 한 결정을 존중하고 최악은 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며 "22대 국회에서는 비례대표를 좀 더 늘리고 진짜 다당제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 이 대표의 장기적 과제일 것"이라고 했다.
이 대표는 앞으로 여러 정당 및 시민사회와의 협의 과정이 어려울 것이란 점을 알고 있다. 이 대표는 지난 6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준연동형 제도를 유지할 경우에 제일 우려한 점은 갈등이다. 갈등 관리가 과연 원만하게, 신속하게 이뤄지겠느냐 하는 점이었다"며 "앞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표가 열일곱 살 일기에 적고 지금껏 가슴에 새겼다는 '어렵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란 신념이 이번에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두 달 남은 4.10 총선이란 종착역에서 확인될 것이다.
김성은 기자 gttsw@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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