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응답하라'? 왕가위 '번화'에 중국인들 왜 열광하나 [차이나는 중국]
[편집자주] 차이 나는 중국을 불편부당한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1999년 2월 필자가 처음 중국 상하이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풍경이다. 그 두 달 전 베이징 수도공항에 착륙할 때, 녹색 외투의 인민해방군을 보고 '여기가 중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과 너무 대조적이라서 지금도 기억이 난다.
필자의 첫 인상처럼 상하이는 베이징 등 중국의 다른 지역과는 상당히 달랐다. 돈을 좋아하고 계약을 중시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에서 상하이사람을 표현할 때 꼭 쓰는 단어가 '징밍'(精明·정명)이다. 영리하고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뜻인데, 상하이사람은 이해타산에도 밝다.
상하이는 1978년부터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의 선봉장 역할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1990년 12월 중국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곳도 바로 상하이다. 지금은 상하이증시가 하루가 멀다하고 하락하지만, 1992년 상하이지수는 1년 만에 약 100에서 1000으로 10배 폭등하며 벼락부자를 양산했다.
이런 1990년대 상하이를 다룬 드라마가 바로 왕가위 감독의 '번화'(繁花·무성한 꽃)다.
번화는 소설가 진위청의 2012년작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진위청은 이 작품으로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마오둔문학상을 수상했는데, 왕가위 감독은 2014년 번화의 판권 매입에 나설 정도로 일찍부터 번화에 꽂혔다. 왕가위 감독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5살 때 가족과 홍콩으로 건너갔다.
주인공 아바오는 1992년 상하이증시가 10배 급등하는 동안 한몫 벌어들이며 사업가로 성장하기 위한 자금을 만든다. 특히 1992년 상하이거래소는 처음 신주인수증을 발행했는데, 이는 중국 주식시장 초기 최고의 기회였다.
당시 신주인수증 가격은 장당 30위안(5500원)에 달할 만큼 비싸서 처음에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큰 손들이 계산해보니 신주인수증 물량이 200만장이라면 상당히 수익이 나는 거래로 밝혀졌다. 마지막 날 수많은 사람들이 증권사 객장에 몰리고 아바오는 간발의 차로 신주인수증을 대량 매수하는 데 성공한다.
4개월 후 상하이증시가 대세상승장을 맞이하면서 장당 30위안인 신주인수증은 160배 폭등했다.
번화를 보면서 30부작 드라마가 아니라 30부작 영화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오래 전 열혈남아(1988), 아비정전(1990), 중경삼림(1994)을 보면서 느꼈던, 왕가위 감독의 독특한 화면 미학이 번화에 자주 등장해서인 것 같다. 주인공 아바오가 주택 지붕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장면과 이때 아바오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예슈의 말이다.
"남자는 몇 개의 지갑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세 개다.
첫 번째 지갑은 네가 실제로 가지고 있는 돈이다.
두 번째 지갑은 신용으로, 다른 사람 지갑 안에 있지만 네가 움직일 수 있는 돈이다.
세 번째 지갑은 다른 사람들이 네가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돈이다."
시계공장 근로자였던 아바오는 빈털터리였다. 예슈의 지시로 주식투자를 시작할 때도 절친인 수산시장 상인 타오타오에게서 빌린 돈으로 투자를 한다. 처음 6000위안을 빌렸다가 반 토막이 나서 3000위안만 남았으나 다시 타오타오에게 7000위안을 빌려 1만위안을 만든다. 두 번째 투자는 성공해서 아바오는 상당한 목돈을 만든다.
아바오의 투자 손실은 예슈의 계획이었다. 예슈는 손실을 본 아바오에게 뉴욕의 엠파이트 스테이트 빌딩은 1층에서 꼭대기까지 뛰어서 올라가는 데 한 시간이 걸리지만, 지붕에서 뛰어내리면 8.8초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예슈는 "이게 바로 주식"이라며 "주식시장에서 돈을 벌려면 먼저 잃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예슈는 "무역은 다른 사람의 닭을 빌려서 자신의 계란을 낳는 것과 같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닭을 빌려줘서 우리의 계란을 낳게 해줄 만한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짧은 내용이지만, 무역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해준다. 다른 사람(생산자)이 생산한 제품으로 자신(무역업자)이 돈을 버는 구조인데, 생산자 입장에서도 이득을 보는 구조(판로 개척 등)가 만들어져야 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아바오는 상하이의 유서 깊은 호텔인 화평(和平)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는데, 번화에는 황푸강을 오가는 바지선이 자주 등장한다. 상하이에서 제일 번화한 난징루(南京路)도 빈번하게 언급된다. 당시 난징루에 있는 백화점에 제품을 납품하는 게 중국 기업가들의 꿈이었다.
번화에서 아바오는 "1993년 난징루를 걷다 보면 날아갈 것 같은 시대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운 좋게도 좋은 시기에 태어나 그 시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아직 모든 것이 정의되지 않았고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였다"고 말한다.
1990년대 개혁개방의 수혜를 한 몸에 받은 상하이를 대변하는 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 번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는 건 현재 경기 둔화와 부동산 침체에 직면한 중국인이 온갖 희망과 꿈에 부풀었던 그 시기를 그리워하기 때문인 것 같다.
김재현 전문위원 zorba00@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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