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천장’ 탓? 설날 두고 ‘중국 새해’라는 서구권 회사들

윤솔 2024. 2. 10.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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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날에 고향에 간다고 하면 동료들은 공감하기 어려워합니다. 2주를 쉬게 돼 업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홍콩 출신으로 영국 런던에서 일하는 켈리(22)는 직장에서 설 명절을 설명하는 것이 어렵다. 매년 2월이 되면 그는 다른 동료들처럼 연말에 휴가를 내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닌 왜 지금 휴가를 내려고 하는지를 해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런던의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베트남인 코이(23)는 상사로부터 ‘음력 중국 설날(Lunar Chinese New Year)’을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코이는 “그래도 ‘중국 새해(Chinese New Year)’라고 하는 것보단 낫지 않냐”며 웃었다. 
지난 2023년 1월 2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에서 중국 사자탈을 쓴 사람들이 관중 앞에서 묘기를 부리고 있다. 런던=로이터연합뉴스
말레이시아에서 온 변호사 아이비(32)는 속은 기분이다. 회사가 음력 설날을 기념한다고 하자 그는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설날 전통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출근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무실은 중국식 등불로 장식됐고, 누군가 중국 사자탈 춤을 선보였으며, 음력 설날에 대해 배우는 자리에 참석한 해외 출신은 자신을 제외하면 중국인 동료 한명 뿐이었다.

7일(현지시간) BBC방송은 아시아에서 온 여러 외국인 노동자들이 영국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음력 새해 연휴에 대한 현지 기업들의 인식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에서 음력 새해를 기념하는 인구가 20억명에 가까운데도 많은 기업에선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직원들은 자신의 문화적 관습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다양성 및 포용성 컨설팅 회사 패러다임의 핀야 쳉 수석 컨설턴트는 “기업들이 음력 설을 기념하는 다양한 국가와 커뮤니티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며 다양한 나라의 음력 설을 ‘중국 설날’로 부르거나, 음력 설을 기념하지 않는 국가까지 이를 기념한다고 가정하는 등의 안타까운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고 BBC에 말했다. 
10일(현지시간) 인도에서 음력 새해 첫 날을 기념하는 중국계 인도인들 모습. AP연합뉴스
◆“아시아계 고위직 부족이 근본적인 문제”

BBC는 아시아계 직원들이 느끼는 소외감에는 흔히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으로 인한 현상, 즉 아시아 국적이나 아시아계 이민자가 조직 내 리더 위치에 잘 기용되지 않는 상황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슬론경영대학원에서 지난해 실시한 연구에 따르면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등 동아시아 근로자들에 대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어 이들이 고위직에 기용되는 데 장벽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BBC는 “고위직에 동양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설날을 조직적으로 홍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짚었다. 

◆직장 내 다문화주의, 사기 증진에 효과적

기업 입장에서 각 문화의 기념일을 세심하게 다루는 것은 어렵고 품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BBC는 근로자들의 세세한 문화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이들의 소속감을 증진시키고 사기를 북돋아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쳉 컨설턴트는 “직장 내 다문화주의는 직원들이 자신의 동료들을 ‘편견이 덜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한다”며 “이는 직원 참여도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맥킨지앤컴퍼니의 연구에 따르면 다양성을 선도하는 기업은 재무적으로 동종업계보다 35% 더 높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높으며, 근로자의 경우 소속감이 강한 근로자는 생산성이 높고, 이직 빈도가 낮으며, 병가를 내는 횟수가 적다는 딜로이트의 분석 결과도 있다.

런던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일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카산드라 용은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 걸쳐 아시아 다양성 네트워크(ADN)를 설립해 이끌고 있다. 용은 “나 자신이 직업적으로 성장하면서 나와 다른 아시아계 동료들처럼 (영국 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 우리 문화를 축하하는 커뮤니티를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확인했다”고 BBC에 말했다. 

쳉 컨설턴트는 “(설 명절에 대한) 고용주의 미적지근한 태도는(노동자들을) 회사에 대해 체념하게 하고, 고용주에게 기대해야 할 기대치를 낮출 수 있다”며 “기업들은 정말 많은 직원이 음력 설을 기념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꼭 아시아계 리더가 없더라도 기업들은 충분히 직원들의 문화적 배경에 대한 존중을 보여줄 수 있다”며 “직장 내 다문화 프로그램의 성공은 고위급 리더가 관련 활동을 만들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데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윤솔 기자 sol.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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