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음 아래아(ㆍ) 발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③ <모래에도 꽃이 핀다> 경남 사투리 선생님 이진혁
배우 이진혁(43)은 2024년 1월31일 종영한 이엔에이(ENA)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이하 <모래꽃>)의 경상남도 사투리 감수·교육을 맡았다. <모래꽃>은 가상의 씨름도시 거산을 배경으로, 거산군청 씨름단 소속 김백두(장동윤)와 소꿉친구 오유경(이주명)이 함께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연인 장동윤·이주명은 각각 대구·부산 출신이어서, 이진혁은 ‘비(非)경상도권’ 배우 이주승·장영남·장희정 등의 사투리를 담당한다.
“경상도 사투리라고 ‘~습니더’로 말을 끝맺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냥 ‘~습니다’로 쓰고 억양에 신경 쓰자고 해요. 전부 ‘~습니더’로 끝내면 시청자가 보기에 (자연스럽게 사투리를 쓰는 게 아니라) 흉내 내는 느낌이 들 수 있거든요.”
그동안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이 등장했기에, 이진혁은 “경상도에서 지낸 경험이 없는 배우나 시청자도 누군가 사투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면 ‘저건 좀 어색하다’고 느낄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작품 속 경상도 사투리 연기도 갈수록 높은 수준(!)을 요구받는다는 것이다.
경남 사투리는 성조(소리의 높낮이)로 뜻이 달라지는 특성 때문에 억양 익히기가 필수다. 성조도 저·중·고조 삼단으로 나뉜다. ‘가가 가가’가 성조에 따라 ‘그 애가 그 애야?’(중/저/고/중)이거나 ‘그 애가 (무언가를) 가져가서’(중/저/고/저) 등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이진혁은 사투리 수업 때 먼저 소리의 높낮이를 살핀 뒤, 배우가 억양에 익숙해졌다 싶으면 “조금 더 디테일하게 경상도 느낌을 살리는 발음”을 알려준다. “‘뭐라 하노’ 같은 대사가 있으면, ‘뭐’를 발음할 때 모음 ㅓ에 ㅡ를 섞어 ‘므어라하노’에 가깝게 발음하면 사투리 맛이 더 살아요.”
시청자는 이미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사투리 쓰는 주인공들의 청춘 로맨스에 익숙하다. <모래꽃>에서도 말은 무뚝뚝하지만 눈빛과 행동으로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장면들이 눈길을 끈다. 백두가 저녁 식사를 못한 유경에게 “이따 밤에 방에서 라면 끼리줄까? 라면 먹고 갈래?” 묻자 유경이 이렇게 답하는 식이다. “이기 진짜 어디서 지금 까대기(유혹함)를 치고 앉아 있노?”
이진혁은 “경남 사투리가 겉표현은 예쁘지 않아도 속정을 따뜻하게 품은 경우가 많아서,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청춘이 자기 마음을 서툴게 표현하고 ‘밀당’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드러내기에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진혁이 경상도 사투리 감수를 시작한 작품은 부산중앙고등학교 농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리바운드>(2023년)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20대에 배우의 꿈을 품고 서울로 이주했다. <모래꽃>에 이어 2024년 방영 예정인 <조립식 가족>(JTBC) 사투리 감수도 맡았다. “배우로서 수많은 좌절과 낙방이 있지만, 사투리 감수라는 방식으로 작품에 기여하는 일도 뿌듯해요.”
④ ‘찐’ 제주어 드라마 만드는 방송작가 김선희
2021년 영화 <빛나는 순간>, 2022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와 <파친코>(애플TV), 2023년 말 시작해 최근 종영한 <웰컴투 삼달리>(JTBC)까지. 제주도가 등장하는 문화 콘텐츠가 이어지면서 속칭 ‘사투리 끝판왕’ 제주어의 미디어 노출도 늘었다. 하지만 이들 콘텐츠만으론 제주어를 향한 목마름을 채울 수 없을 터! 대사의 99%가 ‘찐’ 제주어인 드라마, ‘원조’ 제주어 드라마를 만든 방송작가 김선희(57)의 작품들을 만나보길 권한다.
김선희는 1967년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서 태어나 대학 때 이사한 제주시에서 현재까지 사는 ‘네이티브’다. 한국방송(KBS)제주방송총국에서 30년 넘게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긴 시간 교양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는데, 2011년 교양 프로 <보물섬>의 한 꼭지로 20분짜리 다큐드라마 ‘이야기 제주사’를 만들면서 장르를 넓혔다. “2010년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소멸 위기 언어로 분류하면서 방송사 내 위기의식도 커졌어요. 제주 역사 이야기를 재현 드라마로 재미있게 풀어보되 제주말로 대사를 쓰면 언어 전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제안했죠.”
‘이야기 제주사’를 100편 이상 만들며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 설 특별기획 제주어 드라마 <멩질먹게 ᄒᆞᆫ저오라>를 내놨다. 2018년에는 지역 방송 최초로 12부작 제주어 드라마 <어멍의 바당>을 제작했다. 이후에도 <가옥신>(2020년) 2부작, <우리가 몰랐던 제주인 이야기>(2021년) 4부작, <차사 강림>(2022년) 2부작 등 제주어 드라마를 꾸준히 선보였다.
제주어 드라마는 대사 대부분이 제주어이고 표준말 자막을 붙인다. 대본은 처음부터 제주말로 쓰는데, 제작진을 위한 표준말 번역본도 함께 만든다. 제주 출신 배우가 연기하더라도 의미를 잘 모르는 부분이 더러 있어서다. “30대 배우들은 대본의 제주말을 부모한테 귀로 들은 경험은 있지만 막상 자신이 쓰려고 하면 발음·억양이 어려운 게 많다고 하더라고요.” 배우가 헷갈려하는 부분을 이야기하면 작가가 녹음해서 배우에게 알려준다. 그는 특히 제주어 모음 아래아(ㆍ)와 쌍아래아(ᅟᆢ) 발음이 쉽지 않다고 했다. 보통 ㅏ 발음으로 아는 아래아(ㆍ)는 실제 ㅗ와 ㅓ의 중간 발음이다. 하지만 이 발음을 쉽게 내지 못할 경우엔 ㅗ나 ㅓ에 가깝게 발음해야 한다. 쌍아래아(ᅟᆢ)의 경우도 비슷하다. “육지 배우”들이 연기할 때는 연극배우를 섭외해 대본을 통으로 녹음해 전달하기도 한다.
작가 경력이 오래됐기에 표준어정책 때문에 방송의 사투리 사용을 규제하던 ‘보수적’ 시기에 대한 기억도 있다. <6시 내고향> 같은 교양 프로에서 제주 소식을 전하는 지역 리포터가 주민과 대화하며 제주말을 쓴 것조차 심의에 걸리는 시절이 있었다. 그런 여러 상황으로 인해 제주어 소멸이 심화했고, 어느덧 아역 배우들은 제주에서 태어나 자랐어도 제주말을 거의 알지 못한다. 이들은 출연이 확정되면 부모는 물론 조부모 등 주변 어른을 총동원해 제주말 대본을 달달 외운다. 배우를 비롯한 제작진에겐 드라마 참여 자체가 제주어 체험 학습의 장이 된 셈이다.
김선희의 가장 큰 사투리 선생님 역시 어머니다. 김선희는 “할머니와 손주가 나란히 앉아서 제주말로 스스럼없이 소통하는 날”을 꿈꾸며 방송을 만든다. 최근 여러 채널에서 방송되는 제주어 드라마를 보면 비록 “(제주어 고증에서) 불편하고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미디어에서 제주어 노출이 늘어나는 현상을 반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바뀌는 속성이 있으니까 지금 제주의 젊은 세대가 쓰는 말도 제주말이죠. 하지만 윗세대의 말을 모아서 아랫세대에 전달하는 노력이 많아져야 제주어가 더 오래 풍부하게 살아 숨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관련 기사: 드라마 사투리 선생님들 ①편 <소년시대> 충남 사투리 선생님, <오월의 청춘> 전남 사투리 선생님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