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의 역습…극우 이민혐오가 백인의 '정체성'?

송경호 연세대 정치학과 BK21 박사후연구원 2024. 2. 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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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민주주의 교실③] 포퓰리즘 위협과 오염된 '정체성 정치'

지구가 아닌 이세계에서 눈을 뜬 당신 앞에 주어진 과제는 '마법으로 드래곤 사냥하기'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도구'로서의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연재 ①편 보기 : 트럭에 치여 이세계에서 눈뜬 당신의 정치적 선택은?)

'포스트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청년들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의미인지, 세계의 청년들은 지금의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한 학기 동안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의 '민주주의론' 강의를 통해 이런 토론식 수업에 참여한 대학생들 중 일부는, 그 경험을 기반으로 현재 지구의 민주주의 상황에 대해 독특한 관점과 아이디어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대학(Maastricht University)의 교환학생인 말테 하네스 볼스키(Malte Hannes Wolski)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양종원, 경제학과 이준상은 독일의 사례를 중심으로 정체성 정치와 우파 포퓰리즘의 관계를 살펴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변화(지구온난화) 등 새로운 위기에 따라 정체성 정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포퓰리즘이 등장했으며, 특히 독일 우파 정당의 포퓰리즘이 반체제, 국가 주권 옹호, 반다원주의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는 집단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는 소수자들이 차별의 이유가 되는 특수한 집단의 정체성을 앞세워 전개한 정치적인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넓은 의미에서, 특정 정체성에 호소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행위로 이해되기도 한다.

정체성 정치는 주로 페미니즘이나 LGBT 권리 운동 등 진보진영에서 사용해왔다. 그러나 로저스 스미스가 <반(反) 포퓰리즘 선언!: 민주주의의 위기와 정체성 서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에는 우파 포퓰리즘 혹은 '병리적 포퓰리즘'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스미스는 "정치는 결국 모두 정체성 정치"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경쟁적 서사들이 확산되면서 "민족적·종교적 타자를 배제·억압·박해하고, 겉으로는 입헌주의적 자치를 유지하면서 사실상 독재를 확립할 가능성이 큰" 병리적 포퓰리즘이 득세하게 됐다고 진단한다.

흥미롭게도 이 글의 저자인 말테는 '민주주의론' 수업의 선출 대표 중 한 명으로, 시민 불복종 시위를 막기 위해 안보조항(Security Act)을 헌법에 포함시켰다.

ⓒpixabay.com

정체성 정치와 포퓰리즘의 부상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로 인해 역사의 종말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얼핏 보면, 후쿠야마의 말처럼 국제 정치는 자유민주주의의 선형적이고 필연적인 성공을 향해 진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중국과 같은 비민주적인 국가의 성공을 간과하고 있는 시각이다. 더 깊이 국제 정치를 바라보면 우리는 민주주의로부터 이탈하는 현상과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정체성 정치'라는 슬로건으로 무장한 포퓰리스트들이 안정적이고 번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후쿠야마는 지난 2007년 영국 일간 <가디언>에 '유럽연합의 성공은 정체성 정치의 패배와 종말을 의미한다'는 요지의 기고를 했다. 유럽연합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세계화의 확대, 그리고 국가가 중심이 되는 정치의 감소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유럽연합의 위기와 포퓰리즘의 부상은 그의 예상과 다른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오늘날 유럽의 시민들은 정체성을 통해 가장 많이 정의된다. 그중 적대적 정체성이 확장하는 양상이 있는데 이러한 정체성 운동의 대부분은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소수자 집단에 대한 보호가 지나쳐 개인의 권리가 침해된다는 생각이 이른바 '백인 정체성 정치'가 부상하는 밑바탕을 이뤘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뿐 아니라 미국이나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도 볼 수 있다.

둘째, 국가 주권의 쇠퇴는 국가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져 더 많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공포는, 실제로는 여전히 다수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더 이상 다수자가 아니거나 더 이상 권력을 쥐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기반한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National Rally)', 네덜란드에서는 '자유의 당(Party of Freedom)', 독일에서는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or Germany. AfD)' 등 유럽 전역에서 포퓰리즘 우파 정당이 발호했다.

AfD는 선거 기간 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이른바 '이민 위기'를 부추기며 이러한 흐름에 불을 지폈다. AfD는 이민의 영향으로 쇠퇴하는 독일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이민 정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2017년 AfD의 마크 종겐(Marc Jongen)은 독일의 실존적 문제, 즉 국가의 존폐를 논하며 '독일 정체성의 도난' 그리고 '유레비언(Eurabien)'(독일어에서 유럽을 의미하는 '유로파'와 아라비아를 의미하는 '아라비엔'의 합성어)으로 변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강조했다. (Jongen, 2017).

AfD가 소셜미디어에서 다른 정치적 경쟁자들을 압도하는 것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가속화한다. (Pitt & Pfeifer, 2021). 소셜 미디어와 같은 창구를 통해서 그들은 국경의 폐쇄를 요구하고, 심지어는 입국을 시도하는 이주민에게 총격을 가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Petry, 2016). 이 사례는 정체성 정치의 부상이 포퓰리즘과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현대 포퓰리즘의 부상

우파 정당들이 사용하는 포퓰리즘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반체제, 국가 주권 옹호, 반다원주의다. 세 가지 측면은 모두 AfD의 사례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1981년의 그리스는 현대 유럽 포퓰리즘의 첫 번째 사례였다. 그리스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Andreas Papandreou)의 정치 이념은 국가적 배신, 유럽연합에 대한 비판적 태도, 그리고 위기를 이용하는 점 등에서 AfD를 비롯한 오늘날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정치 이념과 여전히 유사하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포퓰리즘은 소외된 사람들의 감정을 분출시켰고, 소외된 사람들이 불만을 표할 수 있는 목소리를 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포퓰리스트들은 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며 과장된 약속을 하면서 다른
후보들을 거짓말쟁이로 규정한다. 금융위기 이후 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연대는 단절됐고, 유럽을 비판하는 새로운 포퓰리스트들이 탄생했다.

AfD는 유럽연합 해체를 핵심 기치로 창당됐지만, 실제로는 난민 위기가 그들의 발판이자 성공의 촉매였다. AfD가 한 정부 임기 동안 10%에 가까운 표를 얻고 200%의 증가를 보인 것은 두드러지고 신중하며 엄밀한 반이민 캠페인이 그 원인으로 보인다. AfD는 성공적이었던 기간 동안 단정적이고 포퓰리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주장했다. 이같은 AfD의 행동은 전체 여론을 변화시켜 독일 주요 정당들의 유권자 집단 내에 포퓰리즘을 퍼뜨렸다.

베르텔스만 재단(Bertelsmann Stiftung)은 Linke, FDP, CDU, SPD, 그리고 AfD 등 주요 독일 정당 내의 포퓰리즘적 의견과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화제를 분석했다. AfD가 이민 문제에 대한 논의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여론의 분위기를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정당들은 변화하는 정치적 분위기에 적응해야만 했다. 좌파 정당인 Linke를 제외하고 주요 정당의 지지자들은 포퓰리즘적 아이디어를 더 많이 지니게 됐다.

2021년과 2018년 독일 정당 내 포퓰리즘 발전을 비교해보면, 일견 포퓰리즘의 급격하고 가파른 감소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의 새로운 위기가 새로운 포퓰리즘을 등장시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기후 변화로 인해 새로운 이민 물결이 그것이다.

유럽 대륙의 전쟁, 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독일과 AfD만의 변화가 아니라, 이탈리아는 멜로니를, 네덜란드는 헤르트 빌더스를 지도자로 선출했다. 이 두 정치인은 민주주의와 진실이 아니라 포퓰리즘을 대표한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새로운 세대가 유럽연합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새로운 길목에 접어들었다는 것이고, 이러한 운동이 여기에 머물 것임을 나타낸다는 점이다. 독일과 유럽연합에서, 포퓰리즘 또는 우익 정치와 거리가 먼 정당들은 포퓰리스트 우익의 부활에 맞서기 위한 정책을 다시 채택했습니다. 이민 정책에 대한 더욱 비타협적인 입장을 담은 법안이 통과됐다.

인기 있는 행위자들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 미국에서 관찰할 수 있듯, 이러한 흐름은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을 넘어 민주적인 절차 그 자체에 관한 무시하기 힘든 도전을 초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각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각자 다른 독특한 민주주의의 모습들이지만, 이를 단순히 다른 나라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문제인 것은, 그 안에서 우리 사회를 위한 조언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 전역, 그리고 전세계 정치에 포퓰리즘이 확대되고 있다. 정체성 정치를 바탕으로 상대를 배격하고 이기주의로 무장한 이들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소외될 것이라는 두려움, 소수가 된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 대중은 포퓰리즘에 빠져들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도출해낼 수 있을까?

원론적이지만, 결국 답은 소통에 있다. 서로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는 사회, 소수가 되어도 이를 존중해주는 사회가 된다면 포퓰리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독일과 세계의 사례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위한 방향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송경호 연세대 정치학과 BK21 박사후연구원,말테 하네스 볼스키(마스트리히트대),양종원(연세대 정치외교학과),이준상(연세대 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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