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시계와 중·러 경제관계 [김범수의 소비만상]
서구권 러시아의 기상천외함을 말하는 표현이다. 이면에는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다는 조롱의 의미도 담겨있다.
러시아 시계도 이를 닮았다. 독특하고 서구권에서 볼 수 없는 감성이 있지만, 반대로 아직도 20세기 냉전시절에 벗어 나오지 못한 듯 올드하고 투박하다.
러시아 시계 브랜드는 생존을 위해 현대화를 시도하지만 쉽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해가 갈 수록 정밀해지고 발전하는 중국의 시계 산업은 러시아 시계 브랜드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다. 이 같은 모습은 시계가 아니라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갈 수록 커지는 러시아 경제 구조도 닮아있다.
◆최초의 우주시계 ‘스투르만스키’…미국이 기원이 된 ‘뽈룟’
스투르만스키의 대표적인 모델은 단연 ‘가가린(Gagarin)’ 모델이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로 갔을 당시 착용했던 시계를 브랜드화 했다. 유리 가가린이 받았던 시계는 소련 공군 비행학교를 졸업할 때 받은 이름 없는 모델이었지만, 가가린 덕분에 하나의 헤리티지(Heritage)가 형성된 셈이다.
스투르만스키 시계는 비교적 현대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우주와 탐사라는 주제로 과거 디자인을 헤리티지로 유지한 채 시계 재료나 디테일 부분을 개선해 오늘날에도 경쟁력을 갖춘 시계를 생산한다는 평이다.
뽈룟 시계는 1930년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요제프 스탈린의 주도하에 설립됐다. 뽈룟 시계는 특이하게도 미국 뉴욕에 위치한 ‘앤소니아 시계 회사’와 오하이오에 있던 ‘듀버 햄든 시계 회사’를 1929년에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냉전 시대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만해도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초창기 제품의 무브먼트(시계의 엔진)에는 ‘미국 오하이오’ 글씨의 도장이 찍혀있기도 했다.
물론 뽈룟의 일부 모델은 러시아만의 색깔을 잘 넣었다는 평을 받고 있지만, 상당수의 모델은 스위스의 프랭크뮬러(Franck Muller)의 시계 또는 브라이틀링(Breitling)의 네비타이머(Navitimer) 모델을 너무 대놓고 흉내냈거나, 심지어는 중국 제품에서 흔히 볼수 있는 지나치게 시계 내부가 보이는 스켈레톤 양식의 시계를 출시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 시계가 모두 조악하고 소련 시절 감성에만 의존하는 건 아니다. 러시아 시계 중 가장 고급 브랜드는 ‘콘스탄틴 샤이킨’(Konstantin Chaykin)이라고 볼 수 있다. 제작자 자신의 이름을 딴 이 브랜드는 2003년에 설립된 이후 독특하게 설계된 무브먼트와 다이얼로 시계 애호가들의 수집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제일 잘 알려진 모델로는 DC 코믹스의 캐릭터를 모티프로 한 ‘조커’(Joker)가 있다. 콘스탄틴 샤이킨의 조커 모델은 수 많은 짝퉁이 나올 정도로 시계 세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커 모델 이외에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특한 시계와 점잖은(?) 형태의 시계도 출시하면서 고급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냉전 시대인 20세기 당시 소련의 경제력은 중국을 압도했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 중 수장으로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경제 또는 기술 원조를 하는 입장이었고, 중국은 변변찮은 산업력이 없는 국가에 불과했다.
20세기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시계는 스위스나 독일 시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서는 나름 인지도가 있었다. 또한 독자적으로 손목시계에 들어가는 무브먼트를 개발에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비록 그 무브먼트가 다소 조악했지만.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 중러 경제구조가 역전이 된 것 처럼, 시계 산업의 경쟁력도 역전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러시아 시계는 20세기에 생산된 것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나마 콘스탄틴 샤이킨이 고급화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거의 유일하며, 스투르만스키나 라케타 정도만 근근히 소련 시절의 위엄을 근근히 이어오고 있다.
반면 중국의 시계는 21세기 들어서 급속도로 발전한 모습이다. 짝퉁 시계만 봐도 알 수 있다. 불과 10여년전만 하더라도 중국 광저우에서 만든 짝퉁시계는 육안으로 쉽게 구분이 가능할 정도로 조악했다. 하지만 오늘날 ‘VS공장’, ‘Clean공장’, ‘Z공장’ 등을 중심으로 만든 명품시계 가품은 육안으로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해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서울 종로에서 50년간 시계를 수리해 온 한 장인은 “중국 시계를 뜯어보면 한 해가 갈 수록 발전하고 있는데, 러시아 시계는 이 일을 시작한 1970년대 이후로 발전이 없다”며 “굳이 말한다면 중국 시계가 몇 수 위다. 이대로라면 중국 시계가 일본 시계도 위협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김범수 기자 swa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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