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의 영화뜰] "우리 원수님께선…" 북한이라는 낙원을 떠나온 사람들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2024. 2. 1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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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우리나라가 발전해야 되겠다는 걸 느낌다. 우리 원수님께서는 정말 그렇지 않은데 우리 사람들이 머리 나쁜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렇게 됐는가…”

목숨 걸고 탈북한 노 씨 할머니가 죽을 고비를 십 수 번도 더 넘기며 백두산 중국 경계에서 빠져나와 베트남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며 전하는 말이다. 그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 건 대단한 게 아니다. 베트남 어디에서든 콸콸 흘러나오는 조촐한 물줄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수도시설이 없어 사위가 길어다 주는 물에 의존하며 생활했던 북한에서의 삶이 얼마나 낙후된 것인지, 그동안은 알지 못했다. 뒤늦게 두 눈으로 목격한 타국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은 듯 그는 “원수님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 사람들이 머리가 나쁜지…”라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몇 마디를 읊조릴 뿐이다.

▲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스틸컷.
▲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스틸컷.

노 씨 할머니처럼 완벽하게 북한 정권에 세뇌된 사람들마저 북한에서 이탈해서 한국으로 향한다면, 그건 과연 어떤 이유 때문일까. 지난달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는 바로 그 이야기를 취재해 세상에 공개한 작품이다. 중년의 딸과 사위, 어린 두 손녀와 함께 북한에서 도망쳐 나온 노 씨 할머니가 중국, 베트남, 라오스,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는 여정을 뒤따랐다. 이미 그 지독한 시간을 경험한 끝에 우리 땅에 정착한 이소연 씨 등 실제 탈북인의 현실도 지근거리에서 관찰했다. 북한에 밀반입된 카메라로 포착한 공개처형 순간이나 수용소 내의 인권유린 등 우리로서는 도무지 쉽게 접할 수 없는 비극적인 장면까지 고스란히 포착돼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쉽사리 눈을 떼기 어려운 작품이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하는 이들은 비단 탈북자뿐만 아니다. 천안 갈렙선교회에 뿌리를 두고 23년간 1000명 넘는 탈북자를 도와 우리 땅에 정착시킨 김성은 목사의 사정도 입이 떡 벌어지긴 마찬가지다. 감옥에 붙잡혀갈 각오를 하고 탈북자를 인솔해 중국과 라오스의 탈북 동선을 안내하고, 그 과정에서 사고로 목에 철심을 박은 것도 모자라 소중한 가족까지 잃었다. 그런 김 목사를 믿고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의 남한행을 의뢰하는 탈북민 이소연 씨의 현실도 가혹하긴 매한가지. 의지할 건 지직대는 전화기 뒤로 들려오는 북한 현지 브로커의 냉담한 음성 정도다. 탈북에 실패한 아들이 수용소에 붙잡혀 고문으로 처참한 지경이라는 이야기에도 손쓸 방도 하나 없는 엄마는 타들어 갈 정도로 뜨거운 눈물만 끝없이 흘릴 뿐이다.

▲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 포스터.

<비욘드 유토피아>가 공론화하는 건 일차적으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못하는 북한이라는 집단의 문제겠지만, 궁극적으론 그로 인해 탈북민은 물론이고 인권에 대한 존귀한 뜻을 품은 남한의 개인들마저 큰 종류의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70년 넘게 분단된 현실 위로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켜켜이 쌓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 역시 천신만고 끝에 국경 안으로 살아 들어온 탈북민을 추스려 현지 정착을 돕는 수준의 협소한 접근 정도다. 다큐멘터리는 근본적인 변화가 따르지 않는 한 고통스러운 개인들의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엄혹한 현실을 고민하게 한다.

<비욘드 유토피아>는 미국인 매들린 개빈 감독이 연출했고, 미국 최대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지난해 관객상을 거머쥐었다. 이달 18일 열리는 제77회 영국 아카데미시상식 다큐멘터리 부문 최종 후보에까지 오르며 영미권의 잇따른 주목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과 북한의 지난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쉽게 이해할 정도로 그 내용이 명료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시에 국적이나 정체성과는 관계없는 '같은 인간으로서' 등장인물들의 혹독한 현실과 고통을 깊이 가늠해 보게 하는 작품의 올곧음에 설득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제 각국의 관객에게는 질문만이 남는다. 체제가 보호하지 못하는 이 개인들을 과연 누가 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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