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노잼? 포도밭이 실리콘밸리가 된 것처럼…
대전의 숨어 있는 잠재력
미 테크 혁신 상징 ‘실리콘밸리’
내로라하는 빅테크 본사 밀집
과거엔 과수원 많은 농업지대
스탠퍼드대 중심으로 생태계 구축
K-실리콘밸리 가능성 높은 대전
KAIST 포함해 IT 인재 적극 발굴
대덕특구 통한 산업 생태계 마련
‘노잼도시’ 탈바꿈 할 지원 필요해
대전은 '노잼도시'란 꼬리표를 달고 있다. 대표하는 아이콘이 빵집 성심당뿐이라고 꼬집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대전은 심심한 도시가 아니다. 풍부한 R&D 인력과 산업단지를 보유한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도시다. 이런 장점을 잘 살리면 대전은 노잼도시에서 K-실리콘밸리로 '극적인 변신'을 꾀할 수 있다. 포도밭이 실리콘밸리가 된 것처럼 말이다.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는 혁신의 성지다. 구글과 아마존, 애플, 메타 같은 글로벌 빅테크의 본사가 모조리 이곳에 몰려있다. 하이테크의 요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리콘밸리가 어떻게 태동했는지를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1930년대만 해도 실리콘밸리는 양질의 포도주가 나오는 지역으로 유명했다. 사시사철 따뜻하고 햇살이 좋은 기후 덕분에 많은 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던 농업지대였다.
그러다 1950년대 들어 실리콘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실리콘밸리'란 별칭이 붙었다. 당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군수와 항공산업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레이더 같은 첨단기술의 수요가 커지면서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산업 생태계가 구축됐다.
포도주 생산지가 하이테크 산업단지로 변모할 수 있었던 건 미국의 최고 명문 사립대로 꼽히는 스탠퍼드대의 역할이 컸다. 스탠퍼드대는 미국에 있는 대학 중 최초로 전기공학과를 개설할 만큼 기술에 진심인 학교였다.
대학 실험실에서 연구개발(R&D)한 기술을 비즈니스에 활용할 수 있도록 적극 권장했다는 점도 다른 대학과는 차별화한 행보였다. 양질의 지역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기업의 유치를 직접 지원했고, 연구 중인 많은 학생이 회사를 창업하도록 독려했다.
가령, 스탠퍼드대 졸업생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는 1938년 실리콘밸리의 한 차고에서 자신들의 이름을 딴 기업 휴렛팩커드(HP)를 설립했다. 1998년엔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던 래리 페이지가 구글을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글로벌 빅테크로 성장해 미국과 세계경제를 주름잡고 있다.
국내에선 판교 테크노밸리가 '한국의 실리콘밸리' 위상을 갖고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적합한 기업은 따로 있다. 바로 대전광역시다. 많은 사람이 대전을 '노잼 도시'라며 놀린다. 유명한 랜드마크가 없는 데다 특징도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소보로빵으로 유명한 '성심당'이 대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일 거다.
그런데 의외로 대전은 한국의 IT 인재가 밀집해 있는 곳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대전에 있다. KAIST는 국내 최초의 연구중심 이공계 특수대학이다. 다들 알고 있듯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화, 그리고 IT혁명의 중추 역할을 담당했다.
대전엔 KAIST를 포함해 총 19개 대학이 있다. 우수한 젊은 인력을 언제든 기업에 공급할 수 있는 '인재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다. 아울러 국내 최대 R&D 집적지인 대덕연구단지의 위치도 대전이다. 수많은 민관 과학기술 관련 연구시설이 모여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공공기관이 대덕연구단지에 둥지를 틀었다. 이렇게 모인 정부 출연 연구기관만 대전에 26개나 있다.
대전이 이런 과학기술 인프라와 인력을 활용하면, 실리콘밸리처럼 글로벌 첨단산업의 메카로 능히 발돋움할 수 있다. 이미 대전에서 창업해 궤도에 오른 기업도 여럿이다.
최근엔 트렌토시스템즈의 활약이 돋보인다. 이 회사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과 한국과학기술지주회사로부터 시드(seed) 투자를 받아 2020년 창업했다. 처음엔 R&D 중심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기술의 상용화 가능성을 포착하고 연구소기업으로 창업한 케이스다.
트렌토시스템즈는 5G 인프라 구축에 필수인 SDN(소프트웨어 정의 네트워크ㆍ네트워크 제어를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로 구현하는 기술) 기반의 네트워크 슬라이싱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다. 복잡한 기술 같지만, 개념은 쉽다.
이 회사의 플랫폼을 활용하면 기업은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마치 버스만 다닐 수 있는 버스전용차로처럼 데이터만 오갈 수 있는 '데이터 전용도로'를 얻을 수 있다. 이 전용도로는 성능뿐만 아니라 네트워크 보안까지 책임지는 신통방통함을 갖췄다.
스마트시티나 스마트팩토리를 운영하는 수많은 기업이 이 회사의 플랫폼을 찾고 있다. 최근엔 해외로도 눈을 돌렸다. 베트남과 북중미에서 총판 계약을 맺었다. 김영재 트렌토시스템즈 대표는 이런 성과를 대전의 인프라에서 찾았다. "우수한 기술 인력을 확보할 수 있고 첨단기술 인프라를 누릴 수 있는 게 대전의 장점이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빠르게 기술 역량을 키울 수 있어 충분히 하이테크 창업 성지가 될 수 있다."
대전을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은 또 있다. 2015년 KAIST 물리학과 실험실에서 출발해 2022년 10월엔 코스닥까지 입성한 '플라즈맵'이다. 바이오 플라즈마(이온상태의 기체)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플라즈맵은 기술력만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회사가 출시한 소형 플라즈마 멸균기는 관련 업종에서 비非미국계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허가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 회사는 특히 대전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지원을 받으면서 순조롭게 성장했다. 회계와 재무, 사업모델 개발 등 다양한 교육을 받은 덕에 창업 후 7년 만에 증시에 입성할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지방에서 기술창업 혁신을 이끌어 온 대전이지만 아쉽게도 전망은 밝지 않다. 무엇보다 인구 감소세가 뚜렷하다. 2013년 153만명으로 정점을 찍은 이래 10년째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이는 지역의 과학기술 인재와 로컬기업이 매칭되지 않는다는 걸 시사한다. 뛰어난 R&D 성과를 달성하고도 정작 비즈니스는 서울로 올라가서 론칭하는 사례가 대전에도 숱하단 거다.
이 때문에 많은 지역전문가는 대전의 지자체와 기업, 대학이 머리를 맞대 지속가능한 도시 조성을 준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과학적 강점은 갖고 있지만, 수도권과 비교했을 때 주거ㆍ문화ㆍ편의시설 측면에서 열악한 게 사실이어서다. 이런 약점만 보완한다면 대전은 '노잼도시'란 꼬리표를 떼고 K-실리콘밸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도약의 적기는 지금이다.
이준호 지역혁신 오픈이노베이션 포럼 부회장
junho65@naver.com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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